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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희 장편소설 '흙의소리' 출판기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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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민문학기념관’ 농민문학포럼, 난계 재조명지난 11일 오후 2시 충북 영동군 ‘농민문학기념관’(관장 이동희) 주최, 영동군 한국문학관협회 후원으로 ‘난계 박연 재조명’을 주제로 ‘농민문학포럼’을 개최했다. 이날 포럼은 문학평론가 최경호의 이동희 장편소설 흙의소리를 내용으로 하는 ‘박연의 삶과 꿈’에 대해 발표했다. 이어 제2 주제 발표로 '난계 박연의 위상과 영상'을 서화가 안병찬이 ‘박연의 영정에 대한 고증’을 발표하였다. 자유 토론에서는 영동국악축제위원회의 사무국장 소설가 이명건 외의 토론이 진행되었다. 2시간 동안 지역 향토사학회 고적회 회원들과 주민자치회 전국 농민문학작가들이 참석한 가운데 작품 발표도 있었다. 작품 발표는 김영숙 서시 ‘수다쟁이’, 우명환 시조 ‘귀뚜라미’, 윤주헌 시 ‘엿질금’, 민영이 소설 ‘어머니의 땅’, 이성남 시 ‘한민족 대서사시’, 손순자 시‘달과 우물’ 박화배 가곡 ‘아 목동아’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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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 흙의 소리 <111>흙의 소리 이 동 희 못다한 이야기 <3> '난계유고'부록에 시장諡狀 신도비명神道碑銘 발문跋文이 수록되어 있다. 시장은 유현儒賢 공신功臣 들의 시호諡號를 내릴 때 미리 세 가지를 의정議定하여 임금에게 올리고, 그 중에서 하나를 결정하였는데 그 시망諡望을 상주할 때 생존시의 한 일들을 적은 글발이다. 박연의 시장은 영조英祖 때 문신(이조판서) 홍계희洪啟禧가 찬撰하였다. 여기에 그 시장을 간추려 일대기一代記를 되돌아보는 것으로 박연의 생애 이야기를 맺고자 한다. 1378년 박연은 나면서부터 자질이 뛰어난 데다가 총명하였고 천성으로 효성이 지극하고 덕기德器가 침착하고 진중하여 어릴 때부터 하는 일이 성인과 다름 없었다. 어려서 아버님을 잃고 어머님 봉양을 극진히 하면서 뜻을 어기는 일이 없이 곁을 떠나지 않았고 학문에 전념하여 약관의 나이에 문장을 이루었다. 박연은 개연慨然히 예악에 뜻을 두고 널리 유적遺籍을 구하여 강토講討하면서 종률鍾律에 정진하였다. 어릴 때부터 앉으나 누으나 마음 속으로 계획한 바가 있어 악기를 치는 형용을 하며 휘파람을 불다가 입을 다물고 율려律呂의 성음聲音을 입술로 불기도 하였다. 대개 스스로 그 묘리妙理를 얻은 것이다. 부모상을 당하자 죽을 마시면서 여묘廬墓하여 몸이 여위어 피골이 상접되었다. 3년상을 마친 뒤 또 3년 동안 여묘하니 효감소치孝感所致로 토끼가 따르고 범이 호위하는 이상한 일이 있어 이 사실이 조정에 알려지자 정려旌閭하라는 명을 내렸다. 1405년 생원시에 합격하고 1422년 진사시험 제일로 발탁되어 태종왕은 크게 포상을 하였고 옥당玉堂에 선발되어 간원헌부춘방諫院憲府春坊을 거쳤고 세종이 왕위에 오르고 예악과 문물을 갖추지 못한 것이 많았으므로 박연은 규칙을 세워 왕에게 건의하였으며 조의朝儀를 일신하도록 주청하였다. 그때 기장이 해주에서 생산되고 경석이 남양에서 생산되었는데 세종은 박연이 음률에 정통한 것을 알고 율악律樂을 맡아보게 하였다. 박연은 기장을 거두어 푼 촌을 적분積分하여 옛 제도에 의거 황종율관을 만들어 불어보니 그 소리가 중국 황종의 음보다 조금 높았다. 이에 다시 기장의 입자 형태를 밀랍을 녹여 조금 크게 만들어 적분하여 율관을 만들었다. 한 톨이 푼이 되고 열 톨을 쌓아 촌을 삼는 법으로서 9촌으로 황종의 길이를 삼아 삼분손익하여 12율을 산출하였다. 이듬해에 편경을 새로 완성하였는데 중국의 성음을 따랐으나 유빈이 도리어 임종보다 높고 이칙은 반대로 남려와 같았으며 응종 또한 무역보다 낮았다. 그 까닭을 알고 중국의 제도를 약간 변통한 뒤에 율에 맞추었다. 왕이 중국에서 준 편경과 박연이 새로 만든 율관을 맞춰보고 가상히 여겨 마지 않았다. 중국의 편경이 음률에 맞지 않고 새로 만든 편경의 성음이 맑고 아름다웠다. "귀국의 악률이 바른 소리를 얻었으니 아마도 이인異人이 나와서 악률을 주관하지 않습니까.” 중국사신이 왔다가 음률을 듣고 찬탄하여 말하기도 하였다. 박연의 명성은 높았고 왕의 총애는 더욱 두터워 이조 병조 두 판서를 역임하였고 사법관으로 있을 때는 재판을 공명하게 하였다. 문종 때는 중추원사 보문각제학을 역임하였고 또 예문관 대제학을 제수받아 한 때의 사명詞命이 박연의 손에서 많이 나왔다. 세조가 왕위를 이어받자 관직에서 물러나야 했다. 아들이 육신六臣과 함께 화를 당하였고 박연은 삼조三朝의 기구耆舊로 연좌連坐를 면하였다. 1458년 81세로 생을 마쳐 영동 고당高塘, 부인(정경부인 여산송씨)의 묘 뒤에 있다. 3남 4녀를 두었는데 맹우孟愚는 현령을 역임하였고 중우仲愚는 군수를 지냈으며 계우季愚는 육신의 화란禍亂을 당하였다. 1녀는 목사牧使 조주趙注의 아내가 되고 2녀는 사직司直 권치경權致敬의 아내가 되었으며 3녀는 감찰監察 방순손房順孫의 아내이고 4녀는 선비 최자청崔自淸의 아내가 되었다. 박연이 살던 곳에 난초가 많이 생장하여 난계선생이라 일컫는다.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은 선생의 정통한 학식과 정직한 도술道術은 우리의 사표가 된다고 하였고,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은 도덕은 해동海東에 높았고 명성은 중국에까지 현양顯揚되었다고 하였으며,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은 효성은 하늘에 닫고 덕행은 세상에 뛰어났으며 경륜經綸을 세워 국가를 도와 흥성하게 다스렸다고 하였다. 시장을 마무리하면서 찬자는, 아들이 6신과 함께 돌아갔으니 큰 소나무 밑에 맑은 바람이 일고 있는 것이라고 쓰고 있다(與六臣同歸 則長松之下 果有淸風). 송설당松雪堂이라는당호堂號를 쓰기도 하였는데 박연의 생애는 한 마디로 큰 소나무 아래 불고 있는 맑은 바람소리 같은 것이었다. 흙의 소리였다. 아련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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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 흙의 소리<106>흙의 소리 이 동 희 바람 속에 물 속에 3 어려 황황자화 남산유대 녹명은 시경詩經 소아小雅의 편명篇名들이다. 궁정의 연회와 전례 때의 의식시儀式詩에 풍風 아雅 송頌이 있고 아에는 소아 대아가 있다. 정악正樂의 노래말이다. 앞에서도 몇 번 얘기하였지만. 중추원부사 박연은 또 다른 일로 상언하였다. "태봉胎峯 아래에 백성들의 오두막집을 철거하고 그 전토田土를 폐지하니 지극히 통석痛惜합니다.” 태봉 아래 여사廬舍를 철거하고 농사를 짓지 못하게 하는 것에 대하여 참으로 안타깝다고 아뢴 것이다. 풍수지리설에 닭이 울고 개가 짖고 저자가 열리고 마을에 연기가 나면 은연중에 융성하고, 장법葬法을 상고해 보아도 고금의 경험이 모두 사람이 거주하는 것을 꺼리지 않았다. 신라의 능묘陵墓는 대개 왕성王城 안에 있었고 중국 사람들의 묘는 전원田園의 두둑에 있는 것으로 보아 인연人煙이 모인 것도 길吉한 기운이 되는 것은 의심할 수 없다. 그런데 태실胎室이 인연을 꺼려할 것이 없는데 어찌 태봉의 천 길 아래에 있고 평지 땅인 전원田園과 제택第宅을 모두 남김 없이 철수한 뒤에야 길하겠는가. 이것은 심히 이치가 없는 것이다. 만약 이러한 법규를 세운다면 나라의 전토는 줄어들어 민생의 원망이 그칠 날이 없을 것이다. 태평한 날이 오래 되어 백성들이 번성하여 사람이 많아지고 땅이 좁아지면 한 조각의 빈 땅도 없을 것이다. "백성들을 보호하고 먹는 것을 풍족하게 하는 것도 왕정의 급한 바입니다. 진실로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구업舊業을 그대로 허락하시고 옛 사람의 태실의 예와 같이 하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박연의 상언은 바로 풍수학에 내려 의논하게 하였으며 태봉 근방의 인가와 토전土田의 거리 등 실태를 조사하도록 하였고 태봉의 주혈主穴 산기슭 외에는 일찍이 경작한 토전과 태봉 주변의 사사寺社는 옛날 그대로 하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을 듣게 된다. 박연은 다시 성주星州 태봉 밑의 민가民家를 철거하지 말도록 상언한다. "백성을 해롭게 함은 중한 일인데 성상聖上의 마음을 힘들게 할까 두려워하여 그대로 있지 못하고 천총天聰을 어지럽게 합니다. 소신小臣의 명예룰 요구하는 계책이 아니고 성상의 덕이 곤궁한 백성에게 미쳐 한 사람이라도 살 곳을 얻지 못하는 자가 없고자 함입니다. 신의 어리석은 마음을 살펴 시행하소서.” 백성을 위한 간곡한 이 청원은 어떻게 되었는지 기록에는 보이지 않는다. 박연의 상언은 그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아악의 종鍾과 경磬의 소리는 처음으로 만들 때에 오로지 죽률관竹律管에 따라서 교정校正하였습니다. 죽률은 가볍고 가운데가 비어서 추위와 더위에 쉽게 감응하므로 볕이 나고 건조하면 소리가 높고 흐리고 추우면 소리가 낮습니다. 이 이치가 미묘하여 일찍이 미리 헤아리지 못하다가 2년이 지나서야 비로소 깨닫게 되었고 사유를 갖추어 동률관銅律管으로 고쳐 만들어 가지고 교정하였습니다. 그러나 정미精微함을 다 하지 못하여 무릇 6년 동안 교정한 소리가 조금 높기도 하고 조금 낮기도 한데 역시 추위와 더위 때문에 변화가 있는 것이니 이 때문에 아악의 소리가 태반이 어울리지 않습니다.” 문종 1년(1451) 4월에 올린 상언이었다. 종과 경을 더운 철이 오기 전에 소리를 교정할 것을 청원하는 것이었다. "지난 무오년戊午年 4월에 제향祭享과 조회악朝會樂의 종과 경을 다 모아서 춥지도 않고 덥지도 않은 철에 모두 교정할 것을 계청啓請하니 이에 ‘올 가을에 다시 아뢰어 시행하라’고 명하셨는데 지금까지 시일을 미루어 왔으니 참으로 작은 흠결이 아닙니다. 빌건대 금년 더운 철이 오기 전에 모름지기 바로잡아서 길이 후세에 전하도록 하소서.” 무오년이면 1438년, 14년 전이다. 세종 임금의 명이었다. 그것을 이제라도 실현시키고자 그 아들 임금 대에 다시 아뢰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바로 예조에 내려서 의논하게 하였고 예조에서는 가을까지 기다리기를 계청하니 그대로 따랐다. 박연으로서는 마지막 상언이었다. 참으로 길고 끈질긴 상언 상소 상주의 행진이었다. 예악에 관한 것이라고 하였지만 잡박한 개혁의 의지 바로세우고자 하는 집념의 표출이었다. 마당 가운데 넘어진 지게 작대기를 일으켜 세워 놓고자 하는 시골 촌뜨기의 욕망이었다. 모든 일에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듯이 의욕이 넘치고 너무나도 집요한 그의 그칠 줄 모르던 행진도 멈출 때가 되었다. 그 해 9월 도승지 이계전李季甸이 박연의 병세를 진맥하고 말미〔休暇〕를 주는 일로 인하여 우참찬 허후許詡가 이른 것이 문종실록(9권)에 기록되어 있는데 병 때문이 아니고 일흔 넷 다섯의 늙은 나이 때문도 아니고 아 참, 너무도 엄청난 비운의 소용돌이가 그의 삶의 한 가운데로 몰아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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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 ] 흙의 소리 <103>흙의 소리 이 동 희 순명順命 <5> 누가 명한 것이겠는가. 박연의 괴로움은 말할 수가 없고 부끄러움은 하늘을 덮었다. 사실이 그렇고 아니고를 따질 염치도 없었다. 그저 펑펑 울고 싶었다. 그러나 그래서는 안 된다는 나이이고 체면이라는 것을 스스로 너무나도 잘 알았다. 칠십이종심소욕불유구七十而從心所欲不踰矩라 하지 않았던가. 공자의 말씀이다. 일흔 살에는 마음속으로 하고 싶은 대로 해도 법도에서 벗어나지 않았다고 하였다. 물론 그가 성현의 발뒤꿈치도 따라갈 수 없을지 모르지만 주야로 수신修身을 하고 마음을 고쳐 먹고 하였는데 조정이나 사회에는 아니 임금의 눈에는 차지 않았던 것 같다. 일흔 두 살이 되었다. 아직 눈은 밝고 귀는 잘 들렸다. 마음도 변치 않았다. 매일 아침 뉘우치며 매일 새로 다짐을 하며 글을 읽고 썼다. 파직되고 다시 인수부윤에 임용되어 하던 일은 멈추지 않았다. 상언할 글을 계속 썼고 예악 분야의 고치고 바로잡아야 할 문제점에 대한 정리를 하고 상언 준비를 하였다. 그의 일은 쉰 때나 일흔 때나 여일하였다. 그런데 큰 나무 그늘과 같은 세종 임금은 그의 옆에 오래 있어주지를 않았다. 임금은 박연에게 명하여 종률鍾律을 정하게 하였다. 박연이 일찍이 옥경玉磬을 올렸는데 임금은 쳐서 소리를 듣고 말하였다. "이칙夷則의 경소리가 약간 높으니, 몇 푼〔分〕을 감하면 조화가 될 것이다.” 박연이 가져다 보니 경쇠공〔磬工〕이 잊어버리고 쪼아서 고르게 하지 아니한 부분이 몇 푼이나 되어 모두 임금의 말과 같았다. 임금은 음률을 깊이 깨닫고 있었던 것이다. 박연은 너무나 감탄하였고 몸둘 바를 몰랐다. 정말 너무 놀라웠고 황송하였다. 임금의 너무도 정확한 음감音感 너무도 정확한 지적에 대하여 참으로 송구스럽긴 하였지만 그렇게 흔쾌한 눈물이 날 수가 없었다. 두렵고 하늘 같은 존재감이 가슴 가득히 안기는 것이었다. 자신은 참으로 행복한 신하로구나 참으로 훌륭한 왕을 모시고 있구나 하는 생각을 다시 하였던 것이다. 이와 같은 너무나 극적인 대목에 대하여 앞에서도 얘기를 하였지만 실록에는 세종31년 12월, 선어仙馭 1년 전에 기록되어 있다. 이 무렵 한 두 기록을 더 옮겨본다. 불당佛堂의 경찬慶讚 때에 정랑正郎 김수온金守溫이 글을 지어 부처의 공덕과 귀의歸依 존숭尊崇의 지극함을 말하고 여러 대군大君과 판서 민신閔伸 부윤 박연 도승지 이사철李思哲로부터 환시宦侍 공장工匠에 이르기까지 분향하고 부처와 맹세하고 함께 계를 맺고 한 것에 대하여 사헌부에서 금하기를 청하였다. 이에 대하여 임금이 말하였다. "계를 맺는 것은 성심이 있으면 귀의하는 것이고 성심이 없으면 하지 않는 것이니 이것이 어찌 대관臺官의 아랑곳할 것이랴.” 윤허하지 아니한 것이다. 대관은 벼슬아치들을 이르는 말이다. 임금은 영의정 하연河演 우의정 황보인皇甫仁 등에게 또 말하였다. "나의 안질은 이미 나았고 말이 잘 나오지 않던 것도 조금 가벼워졌으며 오른쪽 다리 병도 차도가 있음은 경들도 아는 바이지만 근자에는 왼쪽 다리마저 아파져서… 중략… 예전에 괴이하던 일이 내 몸에 이르렀다. 박연 하위지河緯地가 온천에서 목욕하고 바로 차도가 있었지만 경들도 목욕하고서 병을 떠나게 함이 있었는가.” 세종 임금은, 나도 또한 온천에 목욕하고자 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그 다음 해 임금은 붕어崩御하였다. 그것이 임금과의 마지막 관계였다. 박연이 온천을 갔다가 온 것 그리고 무슨 병인지 차도가 있었던 것, 또 어디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고 무엇을 하고 있고를 다 알고 있었다. 스므살 정확히는 열 아홉 살 아래인 임금은 박연보다 8년 전에 명을 다한 것이었다. 비보를 듣고 박연은 왕궁을 향하여 계속 큰절을 하였다. 백배 천배 헤아릴 수도 없었다. 마구 눈물이 쏟아졌다. 헤어짐의 슬픔도 슬픔이지만 좀 더 잘 할 것을 좀 더 마음에 차게 할 것을 그렇게 하지 못한 것이 안타깝고 서러웠다. 다시 고쳐 할 수 없으니 후회가 되고 더욱 슬펐다. 그리고 그립고 아쉬웠다. 옷깃을 여미고 마음을 가다듬어 되돌아볼 때는 슬픔을 가시었다. 공중에 소리 없이 오른 님 하늘나라 무사히 찾아 갔는가 (雲衢若許乘槎客 直欲尋源上碧穹) 난계선생 유고집 제일 앞에 실려 있는 시 「송설당에서(題松雪堂)」의 마지막 구절이다. 참으로 많은 업적을 쌓고 더러 같이 하다 떠나서 좋은 데로 잘 갔기를 빌고 또 빌었다. 송설당은 박연의 당호堂號이고 한양 살던 그의 집 이름이겠는데, 어디에 그 규모를 얘기해 놓은 데가 없지만, 삼남사녀三男四女가 복닥거리고 살던 집 어디에 가령 눈 맞고 있는 소나무를 뜻하는 당호 편액을 걸어놓았던지 그림이 그려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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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 흙의 소리 (100)흙의 소리 이 동 희 순명順命 <2> 세종 24년(1442) 10월 박연은 예조참의로 제수되었다. 다음 해 정월 예조참의 박연은 최양선崔揚善이 말한 풍수설風水說을 가지고 의논해서 이뢰라는 명을 받았다. 직집현전直集賢殿 남수문南秀文 응교應敎 정창손鄭昌孫과 함께였다. 세종 임금은 호기심이 많았다. 그 호기심이라고 할까 그런 심리를 과학적으로 전환시키기 일쑤였다. 장영실의 과학기술을 비약적으로 발전시키는 데는 그런 과학자 세종의 뒷받침이 있었던 것은 다 아는 사실이다. 15세기 과학시대를 이끌었던 합리주의 군주 세종은 최양선이라는 풍수지리 술사術士에게 귀를 열고 많은 국가 토목사업을 맡겼다. 호기심을 풀어야 직성이 풀리는 세종 앞에 최양선이 나타나 풍수 논쟁에 몰아넣었던 것이다. 풍수는 땅과 공간의 해석과 활용에 대한 동양의 고유사상으로 음양오행설을 바탕으로 한 자연관인데 박연은 음양오행에 대하여는 누구 못지 않게 천착하고 있었지만 풍수에 대하여는 조예가 깊지 못한 대로 심혈을 쏟아 명에 충실하였다. 늘 하는 대로 전적을 뒤지고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물어보고 자문을 구하였다. 왕세자가 또 도승지都承旨 조서강趙瑞康 우부승지右副承旨 강석덕姜碩德 그리고 앞에 말한 남수문 정창손과 그에게 여러 풍수 술자術者들을 불러 수릉산혈壽陵山穴의 길흉을 질의하도록 하기도 하였다. 최양선은 헌릉獻陵(태종太宗의 능) 앞을 지나는 고개 천천현穿川峴을 막지 않으면 산맥이 끊겨 길하지 못하다고 하였다. 삼남으로 내려가는 대로大路를 패쇄하고 흙으로 산을 쌓아 올려야 한다고 하였다. 엄청난 물의를 일으킨 주장이었지만 세종은 선왕의 해로운 일을 그냥 넘길 수 없었고 풍수설에 대한 호기심으로 의정부와 육조六曹하여금 이에 대한 논의를 하라고 했다. 의견들이 분분하였다. "산은 기복起伏이 있어야 좋으니 길이 있어도 해로울 것이 없습니다.” "오히려 발자취가 있어야 맥이 좋습니다.” 그러나 세종은 생각이 달랐고 몇 년을 끌며 여러 예조 집현전 등에 계속 검토를 지시했던 것이다. 결과는 박연 뿐 아니라 여러 관료들이 옳지 않다는 의견을 내었고 사헌부司憲府에서는 직격 상소문을 올렸다. 풍수지리에 대한 비판이었다. 그러나 최양선은 계속 같은 주장을 했고 세종의 집착도 여전했다. 세종은 마침내 고개 길을 없애고 흙을 쌓아 산을 만들었다. 그리고 최양선에게 경복궁을 비롯한 궁성 건축과 남대문 보토補土 공사 등을 하게 하고 경기 충청에서 인부 1,500명을 징발하는 대규모 토목공사를 하는 등 끝이 없었다. 그러다 세종이 스스로 묻힐 자리로 정해 둔 수릉의 혈 방위를 틀리게 주장하다가 구속되었다. 박연의 의견도 일조를 하였다. 그제야 세종은 최양선에 대하여 선언하였다. "앞으로 최양선이 국정에 끼어들면 용서하지 않겠다. 다시는 저 허망한 술사를 국정에 끼어들지 못하게 하라.” 그리고 어명에 의해 승정원은 그동안 최양선이 올린 보고서를 다 불태웠다. 풍수 얘기가 길었다. 천천현은 그 뒤 월천현月川峴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달래내고개가 그곳이다. 성남시 판교, 서울로 들어오는 길목으로 지금도 교통 요지의 고갯길이다. 매일 아침 그 길의 교통사정이 뉴스가 되고 있는 곳이다. 그 길을 막는다고 상상해 보라. 600년 전이나 지금이나 난감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같은 해 4월에는 세종임금이 직접 교지敎旨를 지어서 승지들에게 내어보이며 말하였다. "나는 본래 병이 많았는데 근래에 와서 병이 더욱 심하고 또 왕위에 30년 동안이나 있었으므로 부지런해야 할 정사에 게으름을 피운 지 오래 되었다. 임금이 늙고 병들면 세자가 정사를 섭행攝行하는데…” 앞으로는 세 차례의 대조하大朝賀와 초하루 열엿새 조참朝參은 친히 받들 것이나 그 외의 다른 조참은 모두 세자를 시켜 조회를 받도록 할 것이라고 하였다. 세자는 뒷날 문종文宗이다. 그리고 예조판서 김종서金宗瑞 참판 허후許詡 참의 박연을 불러서 일렀다. "경들은 연향燕饗하는 데에 모두 남악男樂을 쓰도록 하였는데…” 세종은 매우 좋은 생각이라고 하며 한漢나라 고조高祖와 당唐나라 태종太宗 같은 사람은 어진 임금이라 일컬었는데도 모두 여악女樂을 이용하였다고 하고, 만약 남악만 쓴다면 여덟 살 이상된 사람을 써야 하고 장성해지면 쓸 수 없게 되며 그들의 치장〔資粧〕도 나라에서 공급해야하는데 만약 여악을 쓴다면 치장을 준비하고 모습도 오랫동안 늙지 않으며 또 부인들의 방중房中의 풍악도 어찌 없음이 옳겠는가. 먼 후일을 염려해서 말하는 것인데 경들이 이 법을 시행하는 것이 옳다고 하면 무엇이 어렵겠느냐고 하였다. 세종의 간곡한 의중을 읽은 모두는 고개를 조아렸다. "연향하는 예는 모두 남악을 쓰는 것이 진실로 아름다운 일이나 방중의 풍악에 여악이 없을 수 없습니다.” 박연의 주장도 왕의 뜻을 바꿀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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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 흙의 소리<82>흙의 소리 이 동 희 되돌아 보다 <5> 며칠 일이 손에 잡히지 않은 대로 서성거리며 하던 일은 놓지 않았다. 책을 보고 글을 쓰고 생각하고 그러기만 하였다. 묻는 말에만 대답을 하고 대답도 네 아니오 그리고 고개를 젓거나 끄덕이기만 하였다. 다래를 만난 것은 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스스로의 괴로움이라고 할까 횡액이 그렇게 이동해 갔던 것이다. 자신도 모르게 발길이 그쪽으로 닿았던 것이다. 그만큼 그녀를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봐야 지난번 불러내어 행군을 하며 얘기하다 돌려보낸 후 처음으로 만난 것이지만 정말 마음이 아팠다. 도대체 그러다 어떻게 될려는지 걱정이었다. 딸이 당하는 불행이 그보다 더 할 수가 있을까. 아내가 당하는 고통이 그보다 더 할 수가 없었다. 그날 그녀를 뿌리치고 오긴 했지만 줄곧 마음이 거기서 떠나지 않았다. 다시 불러내어 얘기를 더 해주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꾹 참았고 그녀에게도 오히려 그렇게 마음이 걸리고 괴롭게 하는 것이 방법이라고 고쳐서 생각을 하였다. 몇 줄 그의 마음을 적어 보내고자 썼다 지웠다 하였지만 다시 구겨버렸다. 그냥 참았다. 스스로 당하는 고통에 그녀에게 닥쳐올 고통이 겹치며 몸부림을 쳤다. 그런 나날을 보내던 어느날 박연은 스스로 깨우치게 되었다. 그것이 아니었다. 그가 크게 잘 못 생각하고 있었다. 이번 일에 대하여 두 가지로 고쳐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그대로 악학에 출사하도록 하라.” 임금은 그에게 제기된 문제를 가르고 명하였다. 대신들 누구 하나 다른 의견을 내지 않았다. 감히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요망스러운 말이 어떻고 사람들을 현혹하게 한 것이 어떻고 죄니 벌이니 하는 말들은 하나의 수사에 불과한 것이었다. 그런 것이었다. 핵심은 변함 없이 하던 일을 계속하라는 것이 아니었던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연은 벼슬을 파직하고…에만 정신이 꽂혀 실의에 빠지지 않았던가. 그랬었다. 도대체 벼슬은 무엇이고 직이란 무엇인가. 문과 초임으로 생원과에 급제하고 다시 6년 피 말리는 각고 끝에 진사과에 급제, 관직 생활을 하기 시작한 후 몇 년이 되었던가. 스물 여덟 살 때부터이던가. 그 때까지는 또 숨이 넘어가도록 과거 시험 공부를 하였었다. 그 합격 급제의 기쁨도 잠시였고 한 발 한 발 한 단계 한 단계 숨도 크게 못 쉬며 앞만 보고 달려 승승장구乘勝長驅 오늘에 이른 것이다. 그렇게 빠르게 높은 자리에 올라간 것이라고는 할 수 없을지 모르지만 그렇다고 아주 승진이 느리고 말직에만 머물러 있는 것도 아니었다. 평균적이라고 할까 일반적으로 봤을 때 빠른 편이라고 할 수 있었다. 왕의 총애를 받고 있다는 말도 들었다. 그것은 사실이었다. 어떻든 자신의 자리 그것을 벼슬이라고 하지만, 벼슬 직職이라고 하지 않는가, 관직의 토속어인 벼슬은 전통적으로 우리 생활에 깊은 영향을 끼쳐 왔다. 벼슬을 차지하기 위하여 안간힘을 다 했던 것도 사실이다. 좌우간 그 자리에 대하여는 불만이 없었고 또 직에 대한 욕심이 없었다. 그것이 솔직한 것이 아니란다면 그런 내색은 전혀 한 적이 없었다. 조금도 그런 내색을 한 적도 없었고 그래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였다. 그것을 신조로 삼고 있었다. 묵묵히 자신의 일만 하였다. 그것도 스스로 찾아서 하였다. 또 직이란 직무이기도 하다. 일이다. 일을 하기 위한 자리이다. 벼슬이란 결국 직책이며 일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파직을 당하는 것이 괴로웠던 것이다. 말이 안 되었다. 그게 말이 되는가. 왕은 그에게 벼슬은 떼고 일은 하라고 한 것이다. 그는 참으로 자신이 부끄러웠다. 세종 임금은 그 자신을 구해준 것이다. 권도의 제소가 얼마나 합당한 것이었던지 부당하고 사감이 개재 되었는지 여부는 중요하지 않다. 그 여부가 어떻든 세종은 박연의 손을 들어준 것이다. 그를 아끼고 사랑하여 그랬는지 그것이 대단히 정당하고 아니고도 중요하지 않다. 일을 하게 해 준 것이다. 그것을 며칠이 지나서야 깨닫게 되었다. "죄송합니다. 너무 큰 죄를 지었습니다.” 그는 엎드려 사죄하였다. 엎드려 일어나지 못하고 눈물을 철철 흘리었다. "더 잘 하겠습니다. 다시 시작하겠습니다.” 이런 깨달음의 기회를 준 주군 세종 임금께 눈물을 흘리며 감사를 드렸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벼슬을 파직한 것에 대하여 감사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고통이라면 그리고 불편이라면 오히려 그것에 대하여 감읍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 고통과 불편이 은혜를 알게 하였고 그것이 현실을 직시하게 한 것이다. 그 횡액은 행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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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 흙의 소리<75>흙의 소리 이 동 희 말을 멈추고 <5> 조하의절을 더 보자. 엄고嚴鼓가 처음 울리면 병조兵曹에서는 여러 시위의 줄과 의장들을 정돈하여 문과 전정殿庭에 베풀되 평상시의 의식과 같이 한다. 좌중호左中護는 중엄中嚴을 청하며 궁관이 각기 제자리로 나가는 것을 돕는다. 우중호右中護는 어인御印을 짊어지고 의식대로 나오면 시위관은 모두 문(閤門)에 나가서 봉한다. 임금이 거동할 때에 엄숙한 위의威儀를 보이고 백관과 시위군사가 제자리에 대기하도록 큰 북을 울리었다. 좌중호는 내금위內禁衛 충의위忠義衛 충순위忠順衛 별시위別侍衛 갑사甲士 등을 이끌고 식장에 들어와 시위侍衛를 도맡아 지휘하던 관원이다. 우중호는 좌중호보다 낮은 직위이고. 엄고가 두 번째 울리면 좌중호는 외판外辦을 정돈시켜 왕세자가 조복朝服을 갖추고 나오게 하되 좌우 시위는 평상시의 의식과 같이 한다. 좌중호가 인도하여 근정문 밖의 위치에 나아가 앉게 한다. 판통례判通禮가 중엄을 청하여 임금이 사정전思政殿에 나오되 원유관遠遊冠과 강사포絳紗袍를 입는다. 전악이 공인工人을 거느리고 자리에 나오면 협률랑이 지휘하는 자리에 나가고 모든 시위관은 각기 기복器服을 입고 있고 상서관上瑞官이 보(御寶)를 받들고 나오면 시위관은 모두 문에 나가 봉영한다. 외판은 임금의 거동 때의 의장이고 통판례는 나라의 큰 의식에서 절차에 따라 임금을 인도하여 모시던 관원이다. 원유관은 왕과 왕세자의 조견복朝見服인 강사포에 쓰던 관이다. 엄고가 세 번 울리면 전의는 치사관의 통찬을 통솔하여 먼저 자기 위치에 나가고 봉예랑奉禮郎은 3품 이하의 여러 신하들을 인솔하여 위차位次에 나아간다. 첨지僉知와 통례通禮가 왕세자에게 위차에 나가 서향하고 설 것을 청하고 판통례가 외판을 정돈시키고 중금中禁에게 말하여 엄嚴을 전하면 지휘봉을 들어 보인다. 그러면 임금이 여연을 타고 나오는데 산선繖扇 시위는 평상시와 같이 한다. 임금이 나가려고 의장이 움직이면 협률랑이 수그리고 엎드렸다가 지휘봉을 들고 일어나고 악공은 축柷을 쳐서 융안지악을 연주한다. 봉예랑은 나라의 큰 의식 때 문무백관을 인도하던 집사관이다. 통례는 통례원의 정3품 벼슬, 좌우에 각 한 사람씩 있다. 중금은 액정서掖庭署의 별감 밑에 두는 심부름꾼. 산선은 임금이 행차 할 때 따르는 의장의 하나로 베로 우산 같이 만들었는데 임금 앞에 서서 간다. 임금이 자리에 올라 향로에 불을 피워 연기가 오르면 상서관이 보를 임금 자리 앞에 평상시와 같이 놓아둔다. 그 때 협률랑은 지휘봉 휘麾를 눕히고 어敔를 긁어 악을 그치게 한다. 휘는 음악을 연주할 때 협율랑이 그 시작과 그침을 지휘하던 기旗이다. 누런 바탕에 용을 그렸는데 휘를 들면 음악이 시작되고 휘를 누이면 음악이 그치게 된다. 통찬은 왕세자를 인도하여 자리에 나가 선다. 전의가 사배四拜 하라 하면 통찬은 찬자贊者에게 전하여 왕세자가 몸을 굽히면 서안악이 울린다. 사배 후 흥興(일어나다) 평신平身(엎드려 절한 뒤 몸을 본디대로 펴다)하면 악이 그치고 치사관이 서계西階로부터 올라와서 임금 앞에 이르러 북향하고 꿇어앉으면 통찬은 왕세자를 도와 꿇어 앉게 한다. 왕세자가 꿇어앉으면 치사관이 ‘왕세자 신 아무개는 삼양三陽이 열리고 만물이 모두 새로워지는 때를 만나 공손히 생각하건대 전하의 지극히 어진 원기를 몸에 받아 큰 복을 성대히 누리고 있습니다’라고 하칭賀稱을 한다. 하례가 끝나고 부복俯伏(고개를 숙이고 엎드리다) 흥興하면 통찬은 왕세자를 도와 부복 흥 사배 평신하게 한다. 왕세자가 부복 흥하면 악이 시작되고 왕세자가 사배 흥 평신하면 악이 그친다. 그러면 치사관은 본 위치로 돌아온다. 대언代言이 임금 앞에서 교명을 받고 뜰로 물러나 서향하고 서서 왕의 교지가 있으면 통찬은 왕세자를 도와 꿇어앉게 한다. 왕세자가 꿇어앉으면 대언이 ‘새해를 맞는 경사를 세자와 더불어 함께 하리라.’ 하고 선교宣敎한다. 선교가 끝나면 대언은 임금 시위 자리로 돌아오고 통찬은 부복 흥 사배 평신을 도와 왕세자가 부복 흥하면 악이 시작되고 사배 흥 평신하면 악이 그친다. 첨지와 통례가 왕세자를 인도하여 나가면 종실宗室과 문무백관들은 조종에 들어가서 별의別儀와 같이 하례한다. 정말 너무도 주도면밀周到綿密하게 짠 각본이다. 이러한 기록들이 어디 다른 데에는 없고 전 시대 제도나 고래의 전적을 참조해 만든 것 같은데 참 너무도 많은 노력, 세세한 공력功力을 기울인 것이다. 악기를 만들고 음률의 고저 장단 청탁을 바로잡는 기능 못지 않게 예의 절차 제도 양식 등을 악과 절차와 조화를 이끌어낸 구성은 종합예술이었다. 그 각본이었다. 왕세자 조하의절에 이어 군신群臣 조하의절에 대하여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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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 흙의 소리 <71>흙의 소리 이 동 희 말을 멈추고 <1> 앞만 보고 달렸다. 그동안 한시도 쉬지 않았다. 생각도 없이 달리기만 했는지도 모른다. 숨을 고를 때가 되었다. 되돌아보면 처음부터 이 일, 음악 업무에 종사한 것은 아니다. 박연이 세종조에 처음 맡아 본 일도 음악과 무관한 것이었다. 약재 관리에 관한 일이었다. 그후 세자 시강원 문학으로 있으면서 음률에 밝음을 인정 받았던 것이고 맹사성 유시눌 같은 예악에 조예가 깊은 고관들의 인정으로 세종의 새 예악정책과 함께 하게 되었던 것이다. 세종 7년 박연의 나이 47세에 악학별좌에 임명되고, 음악에 대한 서적을 편찬하자는 의견을 내놓았는데 그것이 시작이었다. 이 일 이 때를 기점으로 음악 정리의 길, 악성의 큰 걸음을 걷게 된 것이다. 부모의 시묘살이를 하며 산 속에서 피리를 불어 조수鳥獸들을 불러모으고 지프내 강가에서 퉁소를 불며 강촌 사람들의 시선을 끌던 자연 속의 박연朴然은 이때부터 음악의 이론을 바로 세우고 악기를 제작하고 악보를 만들고 예악의 모든 분야 개혁의 선두에 서서 아악雅樂을 완성하는 음악사적 족적으로의 박연朴堧의 생애가 다시 시작되었다. 세종조 초기는 고려의 제도를 새로운 조선 왕조에 맞추기 위한 개혁의 시기였다. 중국 고대로부터 이어진 예악의 원리를 어떻게 조선에 맞게 옮기고 조선의 것으로 정리하느냐 하는 문제로 군신들이 크게 고심하였던 것이고 그것이 새 시대의 과제였다. 그 때 그 문제의 요체를 전적典籍을 바탕으로 주체적으로 풀어 적용을 하였으며 그의 열의와 능력을 인정 받게 되었던 것이다. 거기에 혼신을 다 바쳤던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해주의 거서秬黍와 남양의 경석磬石으로 악기 제작에 가장 기본이 되는 율관律管을 제작하여 편종編鍾 편경編磬을 제작하는 등 음악 실무에 획기적 공헌을 하였다. 박연은 세종 8년부터 2년 동안 편종 528매를 제작하였다. 악기 조율에 절실히 필요했던 편종을 제작함에 따라 이전의 악기 제작보다 더욱 조율된 악기를 제작하게 되었고 제례 회례 조회, 국가의식에 필요한 악기가 정비되었다. 금琴 슬瑟 대쟁大箏 봉소鳳簫 생笙 화和 우竽 훈塤 호箎 쟁箏 등. 박연은 많은 의식음악儀式音樂을 바로 세우기 위하여 많은 상소上疏를 하였다. 고치고 바꾸고 바로잡고, 개혁 정비를 청원하는 것이었다. 끈질기고 줄기차고 거침이 없었다. 그것들을 하나 하나 기록해 본다. 위에서도 부분 부분 이야기 하였다. 먼저 제례음악에 대한 상소이다. 너무 많아 개조식으로 제목만 적어본다. 시간적 순서이다. 종묘와 조회에 울바른 음악을 정하자는 상소 사향祀享의 아악을 바로잡자는 상소 제향祭享의 악을 완성하고 아악을 두어 집례자에게 고하게 하자는 상소 사향의 아악을 바로잡자는 상소 제사 때 입는 악공의 복식을 개정하자는 상소 뇌고雷鼓와 영고靈鼓를 바꾸자는 상소 종묘악에 육구六句 황종을 고쳐 사용하자는 상소 묘악에 사성四成을 사용하자는 상소 뇌고 영고 노고路鼓의 제도를 바로잡자는 상소 세종 8년에서 23년에 이르는 장구한 시간 동안 상언한 것이다. 이것들은 물론 제례음악에 대한 것이고 계속 얘기하려는 예악 전반에 걸친 상소는 실로 방대하였다. 한 선비 생애 절정기의 정열을 다 바친 것이었다. 여기서 왜 종묘악을 정비하여야 하는가, 그 당위성을 말하고 조선 초기 제향악의 문제점을 낱낱이 지적하였다. 박연은 「주례周禮」춘관春官의 수정修訂 사례를 제시함으로 설득력을 가졌다. 모든 주장에 그는 전적典籍에 의거해 주장하였고 그것이 너무도 적확하고 해박하였다. 위에 열거한 제목들의 청원한 내용을 적어본다. 예악의 중요성과 악의 원리를 설명함으로써 종묘악을 제정하자는 내용 종묘악과 사직社稷 석전釋奠 원단圜壇 적전籍田 선잠先蠶 산천山川 풍운風雲 뇌우雷雨 등의 제악을 구분하고 제사 절차에 따른 등가登歌 헌가軒架의 악을 음양합성陰陽合聲으로 사용하자는 내용 제향 때 예절에 맞는 악의 조리調理를 절도 있게 분별하자는 내용 제사 때 입는 악공의 복식을 개정하자는 내용 종묘 강신악降神樂에 사성을 사용하자는 것과 종묘 제향시 전하의 승강 출입시 육구 황종을 사용하자는 내용 제향 때 사용하는 뇌고 영고 노고를 바로잡자는 내용 그렇게 여섯 자지로 요약할 수 있다. 이상의 문맥 그리고 이하 몇 대목 기술 등에 『역주譯註 난계선생유고蘭溪先生遺藁』(권오성 김세종 공역, 국립국악원 1993)의 내용을 인용하였음을 밝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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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 흙의 소리 69흙의 소리 이 동 희 흙의 소리 <5> 상언한 내용을 더 보자. 제악祭樂에 쓰는 관모冠帽의 제도에 대한 것이었다. "당상堂上과 당하堂下의 여러 악공들의 관冠에 대하여 아룁니다. 당송唐宋의 제도에는 조회와 제향에서 모두 개책관介幘冠을 썻는데 우리나라에서는 흑포두건黑袍頭巾을 쓰고 있어 모양이 좋지 못합니다. 이에 대한 근거가 없으므로 원컨대 당송의 제도 대로 개책관을 고쳐 쓰게 하옵소서.” 개책관은 중국 전국시대 문관이 쓰는 관의 하나이며 조선 시대 아악을 연주하던 악공이 쓰던 관을 이르던 말이다. 단단한 재질의 머리띠를 정수리에 얹어 쓰는 관으로 위와 같은 박연의 상주로 처음 행해졌던 관모冠帽였던 것이다. 공인工人들이 입는 옷은 당나라에서는 주구의朱褠衣와 주련장朱連掌을 썼지만 그 제도가 자세하지 못하고 송나라에서는 비란삼緋鸞衫을 썼는데 그 제도는 상고할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오승포의五升布衣를 쓰고 있는데 아주 보기가 안 좋고 적삼〔衫〕의 제도가 아니니 원컨대 송조宋朝 묘악廟樂의 제도에 의거하여 난삼鸞杉으로 고쳐 쓰되 구승九升 명주를 쓰게 하는 것이 좋겠다고 아뢰었다. 문무文舞에 쓰는 관은 당나라에서는 위모관委貌冠을 쓰고 송나라에서는 평면平冕을 썼는데 평면은 선유先儒들이 잘 못 되었다고 하였고 위모관에 대하여는 「사림광기事林廣記」주해註解에, 주周나라의 위모관은 지금의 진현관進賢冠이 바로 그 유상遺像이라고 하여 진현관의 제도를 상고하여 보니 섭숭의聶崇義의 「삼례도三禮圖」에 나타나 있는대로 촌분寸分을 낮추면 족히 의거할 수 있다. 우리나라 문무의 관은 종이를 붙여서 만들되 두 조각을 만들어 연결하여 쓰므로 이마가 비어 덮이지 아니 하니 춤추는 사람의 머리가 모양에 맞지 않는다. 그러니 진현관으로 고쳐 쓰게 하는 것이 좋겠다고 하였다. 그리고 무무武舞에 쓰는 관은 당송에서 모두 평면平冕을 썼는데 진양陳暘이 비난하기를 면冕을 쓰고 간干을 쓰는 것은 천자의 예이다. 제후諸侯가 면을 쓰고 대무大武의 춤을 추는 것도 「예경禮經」에는 분수에 맞지 않는다고 하였는데 하물며 무랑舞郞이 춤추는 데에 어찌 평면을 쓸 수 있겠느냐고 하며, 작변爵弁으로는 문文을 춤추고 위변韋弁으로는 무武를 춤추게 하는 것이 옳겠다고 하였다. 우리 조정에서는 예전에 평면을 썼으니 진씨의 말대로 가죽고깔〔皮弁〕로 바꾸어 쓰는 것이 좋겠다고 하였다. 박연은 이렇게 문무의 춤을 추는 데에 따르는 의관에 대하여 먼저 관에 대하여 잘못 쓰이고 있는 관행과 제도를 지적하고 올바른 모형을 제시하며 아뢰었다. 옛 기록과 선유들의 의견으로 고증한 제도이며 그의 견해인 것이다. 앞에서 말한 계책관 뿐 아니라 작변 위변 피변이 다 박연의 상언으로 처음 행해졌던 제도로 그 어원語源이 되고 있다. 상언은 계속되었다. 이번에는 복색服色에 대한 것이었다. "옛 제도에는 악정樂正 악사樂師 운보인運譜人 등의 복색이 있었는데 우리 조정에서는 없습니다. 그러니 당송의 제도에 의하여 각각 두 벌을 만들되 악정은 자주색으로 공복公服을 하고 악사는 붉은색 운보인은 녹색으로 공복을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무인舞人과 공인工人의 복색은 한漢나라 때에는 각각 방색方色(동 서 남 북 중의 청백적흑황의 다섯 가지 색)에 따랐습니다. 생각컨대, 한나라는 고대와 멀리 떨어지지 아니 하여 그 제도를 이어 받은 것인데 당송 때에 이르러서는 천신天神 지기地祈 인귀人鬼 등의 제사에서는 복색은 변하지 아니 하였으나 춤추는 사람들은 모두 검은 옷을 입고 공인들은 모두 붉은 옷을 입었습니다. 당나라 조신언趙愼言이 말하기를, 지금 제기祭器와 인욕裀褥은 모두 오방 오교五郊의 빛깔을 따랐으나 의복만은 그 빛깔이 틀려서 춤추는 자는 항상 검은 옷을 입고 공인은 항상 붉은 색을 입으니 적당치 못한 듯 하고 그 무인과 공인의 복색은 방색에 의하는 것이 좋겠다고 하였는데 진양이 이 말을 인용하여 제사에는 검은 색을 쓰고 땅 제사에는 누른 색을 쓰며 종묘에는 수綉를 쓰면 옛 제도에 가깝다고 하였습니다. 우리 조정에서는 문무 및 여러 악공들의 복색은 제사에는 매양 붉은 색을 쓰고 무무에는 검은 색을 쓰고 있는데, 진씨와 조씨의 말에 의하여 인귀에게 제사할 때에는 비수緋綉 난삼을 쓰고 회례의 여러 공인들의 복색은 천신을 제사할 때에는 검은 색을 쓰고 지신을 제사할 때에는 누른 색을 쓰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리고 우리나라 제악의 무인과 당하의 공인들은 옷은 있으되 띠〔帶〕가 없음을 지적하고 당나라에서는 혁대革帶를 쓰고 송나라에서는 말대秣帶를 썼는데 송나라 제도를 따르는 것이 좋겠다고 아뢰고 또 제악에 신는 신〔履〕은 그림에 의하여 만들게 하는 것이 좋겠다고 하였다. 이와 같은 박연의 여러 제도의 상언에 대하여 조정은 예조와 의례상정소로 하여금 논의하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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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 흙의 소리 68흙의 소리 이 동 희 흙의 소리 <4> 그리고 전적典籍을 뒤지고 고래의 예악서禮樂書에 근거하여 철저한 고증과 고제古制 고사古事에 의거하여 판단하는 것이었다. 그동안의 무수히 올린 상언上言이 그랬고 쉴새 없이 입안을 하고 실천하는 방법이 그랬다. 향악을 정리하고 구악을 이정하는 일에 몸을 바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예와 악 전반에 걸친 쟁점爭點을 제기하고 그에 매달려 생각을 하고 글로 썼다. 맞지 않고 잘 못 된 것을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다. 그래서도 안 되었다. 성정이 그렇기도 하지만 그에게 주어진 사명이었다. 그것이 그에게 내려진 왕명이라고 할 때 잠시도 해찰을 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것을 실행으로 옮기는 것은 대단히 신중히 하였다. 상주上奏 상언上言 말이다. "무일舞佾의 위치가 맞지 않습니다. 옛 현인의 도설圖說을 상고하여 보니 종묘宗廟의 가운데에 있고 악현樂懸의 북쪽에 있지 않습니다. 우리 조선에서 악현의 북쪽 섬돌의 남쪽에 벌여놓는 것은 옛 제도에 어긋납니다. 또 땅이 좁고 위치가 좁아서 나아가고 물러서며 변화를 지을 도리가 없으니 진실로 온당하지 못합니다.” 박연의 지적은 너무도 분명하고 단호하였다. 악무樂舞 진퇴의 법을 자세히 상고하여 보면 선유先儒가 말하기를(언제나 전제하는 어투이며 방법이었다) 일무를 추는 데는 사표四表를 세우고 춤추는 사람이 남표南表에서부터 이표二表에 이르는 것을 일성一成이라고 하고 이표에서 삼표三表에 이르면 이성二成이라고 하며 삼표로부터 북표北表에 이르면 삼성三成이라고 하고 다시 남쪽을 전향轉向하여 북표로부터 이표에 이르면 사성四成이라고 하며 이표로부터 삼표에 이르면 오성五成, 삼표로부터 남표에 이르면 육성六成이라고 하였다. 풍악도 또한 여섯 번 변화한다. 그리하여 천신天神이 다 강림降臨하는 것이다. 이것은 천신을 제사하는 환종궁圜鍾宮 육변六變의 춤이다. 또 남표로부터 이표에 이르면 칠성七成이 되고 이표로부터 삼표에 이르면 팔성八成이 되는 것이다. 풍악도 또한 여덟 번 변화한다. 사표는 나라 사방의 바깥이라는 뜻으로 온 세상을 이르는 말이다. 일성은 춤출 때 곁들이는 음악의 단위로 한 장章을 마치는 것을 말한다. 12율律의 기본 음인 황종黃鍾에서 시작하여 육율六律과 육려六呂를 거쳐 다시 황종으로 오는 것으로 넉자를 한 박으로 여섯 박 곧 24자가 일성이 된다. 남표 북표는 사전에서 찾을 수가 없었다. 백과사전 음악사전(세광음악출판사 음악대사전)에도 없었다. 요즘 사전을 대신하는 인터넷도 뒤져보았다. 이표 삼표 이성 삼성 사성 오성 육성 칠성 팔성 그리고 뒤의 구성九成도 마찬가지였다. 우리 옛 음악, 국악 용어의 뜻을 직역直譯으로라도 설명하지 못하나 고명한 독자들은 여러 경로로 알기를 바라고 필자처럼 짐작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그 춤사위와 율동 가락 울림의 변화무변… 종묘 선농先農 선잠先蠶 우사雩祀 등 제사에 여러 사람이 여러 줄로 벌여 서서 춤을 추는 일무佾舞…. 그리하여 땅의 귀신이 다 나와 응감應感하는 것이다. 이것은 땅의 신을 제사하는 함종궁函鍾宮 팔변八變의 춤이다. 또 삼표로부터 북표에 이르면 구성이 되고 풍악 또한 아홉 번 변화한다. 그리하여 사람 귀신도 제사할 수 있다는 것이고 이것은 사람 귀신을 제향하는 황종궁黃鍾宮 구변九變의 춤이라고 하였다. 상언은 계속되었다. "상고하여 보건대 이 사표 진퇴의 절차는 무무武舞의 법입니다. 문무文舞에는 명백한 설이 없습니다. 선유 가공언賈公彦이 말하기를 무무에 사표가 있으니 문무에도 응당 사표가 있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진상도陳常道의 「예서禮書」에 말하기를 가공언의 말이 사리에 맞는 것 같다고 하였습니다. 우리 조선에서도 지난 을해년乙亥年(세종 23, 1431) 겨울 대제大祭를 친행親行할 때에 정도전鄭道傳 민제閔霽 권근權近 제조提調 등이 찬수撰修한 의궤儀軌 속에 문 무 두 가지의 춤을 각각 사표로 하고 서로의 거리를 사보四步로 하였습니다. 그러나 무일을 악현 북쪽 섬돌 사이에 두고 나아가고 물러가는 절차는 없습니다. 원하옵건대 옛 제도에 의거하여 무일을 전정殿庭의 가운데에 벌여 육변 팔변 구변의 의식을 다 하게 하십사고 하였습니다.” 박연은 그렇게 전적과 사례를 가지고 논리를 펴며 아뢰었다. 무일의 위치에 대해서 거리에 대해서… 며칠을 다듬은 논리였다. 어쩌면 참으로 하찮은 대단히 미미한 문제였지만 너무도 중요하게 철저하게 지적을 하고 바로잡으려는 것이었다. "본조本朝에서 의례상정소와 같이 살펴보오니 위에서 말한 묘정廟庭에 헌현軒懸을 설치할 곳은 실로 비좁습니다. 청하옵건대 남쪽 섬돌에서부터 구보九步를 더 넓게 하소서” 종지從之, 박연의 의견을 그대로 따랐다. 세종 14년 1432년 3월 4일 세종실록 55권에 있는 이야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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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 흙의 소리 67흙의 소리 이 동 희 흙의 소리 <3> 이날 경연은 세종 임금이 정악을 창조하는 데 적극적으로 힘을 모을 것을 결의하는 것으로 끝났다. "전하께서 하시고자 하는 뜻을 잘 펴실 수 있도록 전력을 다 하겠습니다.” 영의정 황희가 참석한 대신들의 뜻을 대변하듯 아뢰었다. "고맙소. 정말 그렇게들 해 주길 바라오.” 임금은 영의정과 대신들을 바라보며 진정으로 고마운 표정을 지으며 흡족해 하였다. 그러며 박연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특별히 부탁을 하는 것이었다. 박연도 목례를 하였다. 잘 알겠습니다. 열과 성을 다 하겠습니다. 염려마시옵소서. 간절히 눈으로 아뢰었다. 다음날 바로 세종 임금은 승지를 불러 결심한 뜻을 다시 강조하였다. "우리나라의 아름다운 풍속과 성정을 유지시키고 발전시키고 교화시키기 위하여 예악이 바로 서야 하고 무엇보다 악이 바로 서야 하고 정악을 세우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을 알았으니 한 시도 주저할 일이 아니며 서두르고 박차를 가해야 하겠다. 이것은 국가 백년대계를 세우는 일이며 나라의 기틀을 바로 잡는 일이며 풍요롭고 신명나는 세상을 만드는 일이다. 이 나라 관리들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이며 임금 된 자로서 앞장을 서야 또한 마땅한 일이다.” 그러나 임금은 분부를 내리기에 앞서 의견을 묻는 것이었다. 그러니 어떻게 하면 좋겠는가. 승지는 대언들과 악에 조예가 있고 전문적인 지식을 갖춘 학자들 관리들의 의견을 모으고 뜻을 모으는 것이 좋겠다고 말하였고 지체 없이 그렇게 추진하라고 명하였다. 그러나 그것을 승지나 대언들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나라의 기틀을 바로 세우는 일로서 그야말로 백년대계이며 거국적인 사업인데 왕명을 전달하는 것으로 될 일이 아닐 것 같았다. "거기(예악)에 전담하는 기관이나 부서를 두고 연구하게 하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시간도 여유 있게 주어 충분히 연구하게 하여야 할 것입니다.” 세종 임금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덧붙여 말하였다. "참 좋은 의견이오. 그렇게 해야겠오. 악을 바로 세우는 일 정악을 창제하는 일, 아악을 창제하는 일은 오래 전부터 전해오는 우리의 전통 음악 향악鄕樂을 바로잡고 정리하는 일과 병행해야 하는데 그 또한 일이 많고 어려운 일이며……” 세종 임금은 계속 의견을 내고 과제를 쏟아놓는 것이었다. 아름다운 가사歌詞를 아름다운 곡에 올린다면 이 또한 악을 바로 세우는 일이 아닌가. 그러니 이를 전담할 관서를 두고 과감하게 추진해야 될 것이고 그것을 승지에게 다 맡겨서는 안 될 일이었다. 우선 구악舊樂을 정리하는 일을 관장할 부서를 두어야 일의 두서가 맞는다. 그리고 국가 전례典禮 예제禮制 정치 사회제도 등을 연구 하는 부서를 두어야 한다. 바로 단행된 구악이정도감舊樂移定都監 의례상정소儀禮詳定所가 그것이다. 정악의 길은 어렵고 중차대하였다. 거기에 모든 중지衆志와 정치력을 쏟아야 했다. 임금은 의례상정소에 영의정 황희 좌의정 맹사성 찬성 허조 총제 정초 신상 권진으로 제조를 삼아 추진하도록 명하였다. 그리고 구악이정도감에는 예문관대제학 유사눌 집현전대제학 정인지 관습도감 제조 박연 경시주부 정양을 겸임시켜 구악을 정리하고 아악을 창제하는 일을 하도록 명하였다. 특명이었다. 집현전 옆에 의례상정소를 설치하고 관습도감 안에 구악이정도감을 두었다. 모든 업무가 다 겸임이지만 악을 바로 세우는 정악, 아악 창제를 모든 일의 선두에 두고 추진하였다. 그것이 임금의 의지이기 때문이었다. 임금의 뜻이며 의지이자 나라의 뜻이며 시대의 정신이었다. 새 물결이었다. 앞에서도 얘기한 대로 그 소용돌이에 박연이 있었다. 그는 나라 음악, 국악의 새 물길을 흐르게 하는 데 분골쇄신하였다. 악성樂聖에 이르는 대업大業이었다. 세종 임금과의 인연이라고 할까 유사눌이 그를 임금에게 천거하기도 했고 옛날 아버지 어머니 무덤 앞에서 시묘를 하며 피리를 불던 때부터 소리와 가락은 운명지어져 갔던 것이다. 물론 그의 노력도 있었다. 그의 노력이란 잠을 안 자고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일이었다. 시를 짓고 논문을 쓰는 것이 아니라 새 시대 정신을 구현하는 일이고 예를 세우는 일이고 악을 세우는 일이었다. 그 방안을 세우는 일이었다. 그가 특별히 음감에 뛰어나고 악기제작에 특별한 재능이나 기술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무엇이든 맡은 일에 최선을 다 하고 혼신을 다 쏟은 것이었다. 하나 더 말한다면 자연적인 삶의 대처라고 할까 흙과 같이 나무와 바람과 같이 아무 거리낌이 없이 무위자연의 삶을 추구하는 성정이었다. 궁은 흙의 소리요 상은 나무의 소리이듯이 오음이 다 자연과 우주조화의 음이라고 하는 데에 심취한 철리哲理 악리樂理의 바탕을 삼고 있는 것이었다. 그의 능력과 음감은 그런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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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 흙의 소리 64흙의 소리 이 동 희 아악 <5> 박연의 정확한 제작 기술을 또 너무도 정확하게 확인하고 지적하는 세종 임금의 그 몇 마디 아니 한 마디 촌극寸劇을 바라보는 좌중의 대신들은 숨을 죽이고 감탄을 하였다. 혀를 내두르기도 하고 모두들 오싹 정신을 차리고 부동자세로 지켜보고 있었다. 정말 전문가가 아니면 집어 낼 수 있는 차이가 아닐 수 없었다. 임금이 밀어붙이고 있는 아악 뿐 아니라 일련의 음악정책 그리고 박연을 전적으로 신임하고 받아들이고 있는 이유를 웅변으로 보여주는 장면이 아닐 수 없었다. 임금은 너무도 확고한 의지를 가지고 있었고 박연은 거기에 조금도 어긋나지 않게 이론적으로 기술적으로 응하였던 것이다. 경磬이 이룩되자 박연에게 악기를 제작하는 임무를 전장專掌하게 하였던 것이고 병오년丙午年(세종 8, 1426) 가을부터 무신년戊申年(세종 10, 1428) 여름까지 남양의 돌을 다듬어서 종묘 영녕전永寧殿의 편경編磬 및 여러 제사 때 통용하는 등가편경登歌編磬 특경特磬 등을 이룩하였다. 모두 528매였다. 또 조회朝會의 악경樂磬을 남양에서 만들고 조제朝祭의 악종樂鍾을 한강에서 만들었는데 박연으로 하여금 일을 감독하게 하고 대호군大護軍 남급南汲을 버금으로 일을 맡아보게 하였다. 이에 이르러 헌가軒架의 아악 무동舞童의 기예技藝를 쓰고 여악女樂은 쓰지 않았다. 세종 임금이 아악을 창제하고자 하는 뜻을 밝히고, 박연에게 마음을 다하여 이록하라고 명한 것이 명실상부하게 이룩된 것이었다. 유사눌과 박연에게 안장 갖춘 말을 하사하고 납급 등에게 말을 하사하였으며 전악공인典樂工人들에게 쌀과 포布(베)를 하사하였다. 별좌別坐 및 관원들에게 계급을 올려주고 녹사錄事에게 별도別到를 주었다. 회례아악을 새로 이룩한 공에 대하여 상을 준 것으로 세종 임금의 아악에 대한 관심과 의지를 말해 주는 것이었다. 박연이 안마鞍馬를 하사받은 얘기를 앞에서(세종 13) 하였다. 난계기념사업회에서 만든 연보年譜에 의한 것으로 세종실록(세종 15) 기록과 기간이 차이가 있는데 2회 하사인지는 확인할 수가 없다. 상호군 박연 봉상판관 정양 등이 회례會禮 때의 악공인과 동남童男의 관복을 올렸을 때 세종 임금이 사정전思政殿에 거동하며 문무文武 두 가지 춤의 변화를 짓는 절차와 속악부俗樂部의 남악男樂의 기예를 관람하였다. "남악의 일은 태종 때에 하륜河崙이 헌의獻議하였으나 아직 시행하지 않았더니 이제 근천정覲天庭과 무고舞鼓의 기예를 보니 그 무도舞蹈의 모습이 여기女妓의 춤보다 오히려 낫도다.” 관람후 그렇게 의견을 말하였다. 지난 해(세종 14, 1432년)의 일이었다. 앞에서 왕의 음감에 대하여 얘기하였지만 예술 전반의 감각이 대단히 예리하고 치밀하였다. 박연은 번번이 감탄을 하며 긴장을 하였다. 그의 생각과 일치하기도 했다. "또 문무文舞와 무무武舞의 두 가지 춤은 대신들이 다 어느 한 가지만을 폐지할 수 없다고 말하였으나 내 마음으로는 관복冠服의 제도와 나아가고 물러가는 절차가 만약 혹시나마 그 제도를 바로 알지 못하게 되어 후세의 비웃음을 받는 일이 있게 된다면, 당분간 그 의심되는 것은 제외하여 두었다가 장래의 잘 아는 사람이 바로잡기를 기다리기만 못하다고 생각하노라. 그런 까닭에 내가 다시 의논하여 결정하고자 하였는데, 이제 관복의 제도와 문무 두 가지 춤의 동작하는 모습을 그대로 습용襲用하지 않았으니, 난들 어찌 고쳐 의논하여 제작制作하지 않겠는가. 마땅히 날마다 연습을 거듭하여 조회에 쓰게 하라.” 대신들은 고개를 숙여 왕명에 하복하였다. 임금은 계속하여 일렀다. "문무 무무의 두 가지 춤과 남악의 악공들의 가죽띠를 붉은 빛으로 장식하고 있는데 비록 그것이 옛날의 제도일지라고 붉은 칠〔朱漆〕을 하는 것은 금제禁制된 것이니 그 대신 녹색을 사용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상정소詳定所와 의논하여 아뢰라.” 이에 대하여 황희 맹사성 허조 유사눌 등은 의논하여 바로 아뢰었다. "중국 조정에서는 여지금대荔枝金帶와 가죽띠의 장식은 녹색을 쓰고 있사오니 지금 우리 문무 무무 남악의 가죽띠의 칠도 녹색을 사용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리고 신상은 또 다음과 같이 아뢰었다. "기명器皿을 주칠하는 것은 상․하가 다 사용할 수 없으나 공인의 장식에야 비록 금제하는 색깔을 사용한들 무엇이 해롭겠습니까. 분홍색을 사용하여 옛날의 제도에 맞게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세종 임금은 두 의견을 다 사용하도록 명하였다. "문무를 추는 사람과 악기를 잡는 사람의 가죽띠는 녹색을 사용하고 남악의 가죽띠는 분홍색을 사용하게 하라.” 미세한 음의 높낮이를 정확히 지적하둣이 모든 제도와 동작 색깔까지 세심하게 판단하였다. 그것은 단순한 개인의 호 불호의 문제가 아니고 그런 소리와 빛깔을 찾아 높이 내 건 것은 조선의 주체성이며 민족 음악 예술 정책이었던 것이다. 아악도 그런 것이었다. 온 백성과 민족을 향한 세종과 박연의 정렬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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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 흙의 소리 63흙의 소리 이 동 희 아악 <4> 박연은 해주의 거서(기장) 모양에 의하여 밀〔蠟〕을 녹이고 다음으로 큰 낟알〔粒〕을 만들고 푼分을 쌓아 관管을 만들었다. 그 모양이 우리나라 붉은 기장〔丹黍〕의 작은 것과 꼭 같았다. 곧 한 낱〔粒〕을 1푼으로 삼고 열 낱을 1촌寸으로 하는 법을 삼았는데, 9촌을 황종黃鍾의 길이로 하였으니 90푼이다. 1촌을 더하면 황종척이 된다. 원경圓經을 3푼 4리釐 6호毫의 법을 취하였다. 이에 해죽海竹의 단단하고 두껍고 몸이 큰 것을 골라 뚫으니 바로 원경의 푼수分數에 맞으며 관의 길이를 비교해서 계산하니 바로 촌법寸法에 맞았다. 밀을 가지고 기장 낟알 1천 2백 개를 만들어서 관 속에 넣으니 남고 모자람이 없었고 이를 불어보니 중국 종 경 황종의 소리와 당악의 필률 합자 소리와 서로 합하였다. 그러므로 이 관을 삼분손익三分損益하여 12율관을 만들어 부니 소리가 곧 화하고 합하였다. 이 악기가 한 번 이룩되자 제악祭樂 팔음八音의 악기가 성음聲音에 근거가 있어 한 달이 지나서 신경新磬 2가架가 이룩되고 이를 바치었다. 그러자 지신사知申事 정흠지鄭欽之와 몇 사람들이 박연에게 물었다. "이 모양의 제도와 성음의 법칙을 어디서 취한 것인가?” 지신사는 도승지都承旨를 말한다. 도승지는 승정원承政院의 장으로 왕의 측근에서 시종하며 예문관 직제학直提學 경연慶筵의 참찬관參贊官을 의례적으로 겸하였다. "모양과 제도는 중국에서 내려 준 편경에 의하였고 성음은 신이 스스로 12율관을 만들매 합하여 이룬 것입니다.” 박연이 그렇게 대답하였다. 신臣은 박연을 말하는 것이었다. 앞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그는 12율관을 처음으로 만들었던 것이다. 창제한 것이다. 그러자 여러 대언代言(승지)들이 박연에게 다시 물었다. "중국의 음을 버리고 스스로 율관을 만드는 것이 옳겠는가?” 따지는 것이었다. 중국의 음을 버린다는 것이 옳지 않다는 것이고 또 거짓말이 아니냐는 것이다. 박연의 실력에 의문을 표하는 것이었다. 박연은 다른 말 않고 글을 갖추어 아뢰었다. "지금 만든 편경은 모양 제도는 한결같이 중국 것에 의하였으나, 성음은 중국의 경磬은 대려大呂의 각표刻標한 것이 그 소리가 도리어 태주太蔟보다 낮고, 유빈蕤賓의 각표한 것이 그 소리가 도리어 임종林鍾보다 높으며, 이칙夷則은 남려南呂와 같고, 응종應鍾은 무역無射보다 낮아서, 마땅히 높을 것이 도리어 낮고 마땅히 낮을 것이 도리어 높으니, 한 시대에 제작한 악기가 아니라 생각됩니다.” 음의 세밀한 높낮이를 하나 하나 연주한다고 할까 소리를 들려주며 말하였다. 박연의 대답에는 거침이 없고 막힘이 없었다. 여유가 있었다. "만약에 이것에 의하여 제작하면 결코 화하여 합할 이치가 없기 때문에 삼가 중국 황종의 소리에 의하여 황종의 관을 만들고 인하여 손익하여 12율관을 이룩하여 불어서 음률에 맞추고, 이에 근거하여 만들었습니다.” 박연의 설명은 눈물겨웠다. 지신사와 대언들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불신을 접으며 생각을 다시 하고 있는 것이었다. 세종 임금은 중국의 경 1가와 새로 만든 경 2가 그리고 소 관 방향 등의 악기를 들여 모두 새로 만든 율관에 맞추도록 명하였다. 그리고 말하였다. "중국의 경은 과연 화하고 합하지 아니하며 지금 만든 경이 옳게 된 것 같다. 경석을 얻은 것이 이미 하나의 다행인데 지금 소리를 들으니 매우 맑고 아름다우며 율을 만들어 음을 비교한 것은 뜻하지 아니한 데서 나왔으니 내가 매우 기뻐하노라.” 임금은 희색이 만면하여 여러 대신들을 바라보았다. 박연은 몸둘 바를 모르고 머리를 조아렸다. 무슨 말을 하지도 못하고 연방 흐르는 이마의 땀을 손등으로 닦았다. 그동안 불철주야 화성을 찾아 각고하며 들인 노력들이 꿈결처럼 느껴졌다. 계속 뜨거운 땀이 흘러내렸다. 그런데 그것은 또 순간이고 세종 임금은 그에게 묻고 있는 것이었다. "다만 이칙 1매가 그 소리가 약간 높은 것은 무엇 때문인가?” 정말 그랬다. 이칙 1매가 조금 높은 소리를 내고 있었다. 약간이었다. 정말 약간 높은 소리였다. 이상하였다. 도대체 어떻게 된 것인가. 박연은 정신을 바짝 차리고 침착하게 살펴보았다. 그러다 그 연유를 발견하고 천연덕스럽게 아뢰었다. "가늠한 먹이 아직 남아 있으니 다 갈지 아니한 것입니다.” 그리고 물러서서 이를 갈아 먹이 다 없어지자 소리가 곧 바르게 되었다. 참으로 대단하였다. 박연의 판단과 기민한 대처도 그랬지만 세종 임금의 음감이 그렇게 정확할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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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 흙의 소리 62흙의 소리 이 동 희 아악 <3> 「율려신서」는 이 나라 아악 창제에 초석이 되었다. 중국 고대부터 송대宋代까지의 악률樂律의 이론을 심도 있게 집약한 책으로 박연의 악리樂理의 기반이 되었고 그가 거침없이 논리를 펴고 상언上言을 하고 악기 제작 등을 하게 하였던 동력이 되었던 것이다. 「율려신서」는 두 편으로 되어 있는데 ‘율려본원律呂本元’의 목차를 보면 서序 및 자서自序, 율려신서 천석목록淺釋目錄과 황종黃鍾, 황종지실黃鍾之實, 황종생십일율黃鍾生十一律, 십이율지실十二律之實, 변율變律, 율생오성도律生五聲圖, 변성變聲, 팔십사성도八十四聲圖, 육십조도六十調圖, 후기候氣, 심도深度, 가량假量, 근권형謹權衡 등 13항목과 ‘율려증변律呂證辨’은 조율調律, 율장단위경지수律長短圍徑之數, 황종지실, 삼분손익상하상생三分損益上下相生, 화성和聲, 오성소대지차五聲小大之差, 변궁변치變宮變徵, 육십조六十調, 후기, 도량권형度量權衡 등 10항목이 배열되어 있다. 미국 국회도서관에 소장된 ‘율려신서 천석淺釋’에서 인용한 목차에 보면 가량이 嘉量으로 되어 있다. 어떻든 글자의 뜻으로도 그 내용을 대략 짐작할 수 있을 것 같다. 서는 스승인 주희가 썼다. 박연으로부터 이 책을 전해 받아 든 세종 임금은 손에 놓지 않고 독파하였다. 그리고 왜 악樂인가, 나라와 백성을 어떻게 다스려야 하는가를 다시 생각하였다. 왕은 예와 악, 예악에 대하여 이미 잘 알고 있었다. 인류의 도덕 정치 질서의 틀로서의 예를 최고의 가치로 설정하여 이를 받아들이도록 하기 위하여 악으로 교화함으로써 이상적 사회를 실현할 수 있다고 믿어왔던 것이다. 공자의 예악사상인 것이다. 악은 조화의 원리로써 통합을 추구하고 변이를 추구한다. 그것은 우주의 질서이다. 예와 악은 서로 상반되는 개념이지만 서로 의존하고 있다. 사람의 마음은 정情을 나타내고 정은 성聲으로 발하여 나오며 성은 율律과 조화를 이루어 음音이 되고 음은 덕을 갖추어 악樂이 된다. 음악의 원리를 다시 생각하였다. 예로써 질서를 잡고 악으로써 조화를 이루면 나라는 강하고 평화로워진다. 이상국理想國이 따로 없다. 악은 예를 표하는 중요한 수단이며 왕권의 존엄과 권위의 상징이고……. 세종 임금은 철저한 예악사상가였고 그 실천가였다. 그것은 문학 박연이 충녕군에게 주입한 공맹사상 때문이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박연은 하나의 이론가였고 세종은 위정자로서 정책으로 밀어부쳤던 것이다. 막강한 힘이었다. 그것은 새 물결이 되었다. 박연은, 중국의 것이 좋은 것도 많지만 고쳐야 할 것도 많다고 상언하였으며, 그 잘 못 된 것을 과감하게 고치라고 왕명으로 밀어주었다. 450번이나 올린 박연의 상소를 다 받아들였던 것이다. 새로운 음악으로의 전환 개혁은 아악의 정립으로 이어졌고 밤낮으로 편경과 편종을 연구하여 편경 12개와 거기에 맞는 12율관을 새로 만들어서 정확한 아악을 연주할 수 있게 한 박연은 세종 임금에게 아악의 창제라는 희락을 바치게 된 것이다. 아악의 악보도 편찬해 내고 아악을 우리 음악으로 완성한 것이다. 세종 임금은 경연慶筵에서 「율려신서」를 강독하게도 하였다. 처음 고려 예종睿宗 때 송나라 휘종徽宗이 제악祭樂의 종鍾 경磬 등 악기를 내려 주었는데 제조가 매우 정밀하였다. 홍건적의 난리에 어느 늙은 악공이 종경 두 악기를 못 속에 던져 넣으므로 보존할 수 있었고(세종실록 59권) 명나라 태조 태종 황제가 종경을 다시 주었으나 제조가 매우 거칠고 소리도 아름답지 못하였다. 우리나라 제악祭樂은 팔음八音을 갖추지 못하여 봉상시에서 간직해 오던 십이관보十二管譜만 배울 뿐이고 제사 때가 되면 경은 와경瓦磬을 쓰고 종도 그 수효를 갖추지 못하였다. 거서秬黍(기장)가 해주에서 나고 경석磬石이 남양에서 생산되자 세종 임금은 박연에게 편경을 만들기를 명하였던 것인데 우리나라에서는 본래의 음에 맞는 악기가 없었으므로 해주의 거서를 가지고 그 분촌分寸을 쌓아 고설古說에 의거하여 황종 한 관管을 만들어서 불어보았다. 그런데 그 소리가 중국의 종경과 황종 및 당악唐樂의 필률觱篥(피리) 합자성合字聲보다 약간 높았다. 그래 전현前賢의 논의를 다시 상고하여, 토지가 기름지고 메마름이 있어 기장의 크기가 크고 작음이 있으므로 성음의 높낮이가 시대마다 각각 다르다, 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진양악서陳暘樂書」에 씌어 있었다. 박연은 무릎을 쳤다. "대나무를 많이 잘라서 기운을 살펴서 바르게 함만 같지 못하다.” 북송北宋 진양陳暘의 의견이다. 그러나 박연은 다시 고개를 갸웃거리며 생각하였다. 우리나라는 지역이 동쪽에 치우쳐 있어 중국 땅의 풍기風氣와는 전연 다르므로 기운을 살펴서 음률을 구하려 하여도 징험徵驗이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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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 흙의 소리 61흙의 소리 이 동 희 아악 <2> "참으로 훌륭하오. 그동안 노고들 많았소. 참 대단하고 장하고 자랑스럽소.” 세종은 그동안 적극적으로 협력하고 헌신한 면면들을 바라보며 치하를 하였다. 맹사성 유사눌은 답례라도 하듯이 고개를 수그려 보이었다. 그러나 박연은 임금과 눈이 부딪치지 않으려고 다른 곳을 바라보았다. 아악을 창제하고 그 시연을 하는 오늘까지 사실 제일 노력을 많이 하고 애를 쓰며 속을 태운 사람은 세종 임금 자신이었다. 그러나 그런 이야기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남의 이야기 하듯 말하고 있었다. 혼신을 다해 소임을 다 한 박연은 또 남의 얘기 듣듯이 딴전을 피우고 있었다. 숙연한 마음으로 그동안 있었던 왕과의 고락을 회고해 보았다. 세종 임금은 종묘제례 사직대제 때 사용하는 중국의 아악에 대하여 도무지 불만이고 미흡함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악공들의 기예가 부족한 탓인지 중국에서 가져온 지가 오래 되어서 그런지, 화음을 느낄 수가 없었다. 가락도 맞지 않고 소리가 탁하고 격하였다. 차라리 향악의 멋진 화성和聲과 흥청거리는 가락만도 못했다. 그러나 종묘 사직 제례와 대제 등 조정의 큰 의식에 향악만 쓸 수가 없었다. 왕은 정악正樂을 바로잡아야 하겠다고 작정하고 예문관 대제학 유사눌에게 예악을 강구하고 정악을 정돈하도록 명하였다. 그리고 음률과 악을 잘 알아 이 일을 잘 해 낼 수 있는 사람을 천거하도록 하였던 것이다. 그 사람이 바로 그였던 것이었다. 박연은 예와 악 그리고 정악에 대하여 왕에게 연일 강의를 하는 가운데 '율려신서律呂新書'이야기를 하였다. 송나라 채원정蔡元定이 지은, 율의 원류를 연구해서 소리를 화和하게 조화시키는 법칙을 연구한 악서이다. "경은 과연 과인의 스승이로다!” 왕은 박연의 악에 대한 박학에 탄복하였다. -박종화朴鍾和의 대하소설 「세종대왕」10권의 ‘화음 격음’과 ‘아악 창조’ 대목 부분적으로 참고 적용하였음을 밝힌다. 박연은 너무나 황공하고 학을 타고 하늘을 날으는 것 같았다. "당치 않은 말씀입니다.” 몸 둘 바를 모르고 손을 저었다. 세자 시강원 문학으로 있으면서 이것 저것 가르친다고 하였지만 그것은 옛날 이야기이고 지금은 지존으로 왕이 아닌가. 그러나 왕은 너무나 당연한 자세를 확인이라도 하듯이 같이 손을 저으며 말하는 것이었다. "난계는 나의 변함없는 스승이오.” 그러며 솔직하게 털어놓는다. "공부가 아직도 너무나 미흡한 것이 한탄스럽소. 스스로 새 시대의 물결인 예악을 지휘하는 총사령탑인 줄 알고 있었는데 아직 율려신서도 보지 못하였고 채원정 같은 사람을 알지도 못하고 있었던 것이오.” "주자朱子 주희朱熹의 제자입니다. 연악원변燕樂原辨도 있고 그 외에도 많은 저술이 있습니다만 어찌 모든 책을 다 보실 수가 있는 것이겠습니까.” "아니오. 당장 그 책을 보고 싶소.” "제가 읽던 것이 있긴 합니다만 제 손때가 많이 묻고 땀이 절어 있습니다.” "그게 무슨 상관이오? 빌려준다면 밤을 새워서 읽어 보리다.” "황송하옵니다.” "그게 무슨 말이오? 경의 땀내를 맡고 싶소.” 박연은 정말 너무 황공하고 송구하고 어디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었다. 그러나 그럴 일이 아니었다. "바로 대령하겠습니다. 참으로 영광이옵니다.” 박연은 집 서가에 꽂혀 있는 율려신서를 내일 갖다 드린다고 하였다. 집현전이나 예조에는 그 책이 없었지만 그런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그가 말하지 않아도 왕은 금방 다 알게 되었다. 박연의 책을 기다리기 전에 집현전에 그 책을 찾아 올리도록 하였던 것이다. 하루라도 빨리 날이 새기 전에 읽어보고 싶었던 것이다. 그것은 박연이 책을 가져오기 전에 읽고 있음을 말하려고 하였던 것인데 그럴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야말로 박연의 때와 땀이 묻은 「율려신서」를 받아들면서 진정으로 가상하고 고마움을 절절히 느끼었다. 그러나 그 책을 읽으면서 더욱 감탄하고 박연의 존재를 확인하였다. 중국 고대로부터 송나라 시대까지의 악률樂律의 이론이 심도 있게 정리가 되어 있었다. 거기 다 답이 있었다. 박연의 율관 제작의 문헌적 근거가 되었다는 것을 알게도 되었다. 아악의 창제는 그렇게 시작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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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 흙의 소리 60흙의 소리 이 동 희 아악雅樂 <1> 세종 15년(1433) 1월 1일 정조正朝에 임금이 근정전에 나아갔고 이에 회례연會禮宴을 의식에 따라 베풀었다. 이날, 설날 아침 문무백관이 모여 임금에게 배례한 뒤에 베풀어진 연회는 아주 특별하였다. 아악雅樂이 처음으로 연주되었기 때문이다. 박연이 주도하여 개혁하고 새로 완성한 문묘제례악을 이날 처음으로 사용하게 한 것이다. 아악은 좁은 뜻으로는 문묘제례악을 가리키고 넓은 뜻으로는 궁중 밖의 민속악에 대하여 궁중 안의 의식에 쓰던 당악 향악 아악 등을 총칭하는 음악이다. 정아正雅한 음악이란 뜻이다. 중국 주周나라 때부터 궁중의 제사 음악으로 발전하여 변개變改를 거듭하다가 송宋나라 대성부大晟府에서 대성아악大晟雅樂 대성악으로 편곡 반포함으로써 제도적으로 확립되었다. 고려 예종 11년에 송나라 휘종徽宗이 대성아악과 여기에 쓰일 등가登歌 헌가軒架에 딸린 아악기 일습과 아악에 수반되는 문무文舞 무무武舞 등 일무佾舞에 쓰이는 약籥 적翟 간干 과戈 36벌과 이러한 의식에 쓰이는 의관衣冠 무의舞衣 악복樂服 의물儀物 등을 모두 갖추어 보냄으로써 이땅의 아악의 역사기 시작되었다. 이로부터 대성아악은 원구圓丘 사직社稷 태묘太廟 선농先農 선잠先蠶 문선왕묘文宣王廟 등의 제사와 그 밖에 궁중의 연향宴享에 광범위하게 쓰이게 되었다. 약은 피리이며 적은 꿩의 깃을 묶어 무악에서 손에 쥐는 물건이고 간은 창이고 과는 방패인데 각종 악樂을 행할 때 문무는 약적을 무무는 간척을 잡게 하여 배열을 편성한다. 문성왕은 누구인가. 앞에서는 이야기하지 않았는데 공자孔子를 그렇게 부른다. 당唐나라 현종玄宗이 내린 시호諡號이다. 왕王과 성聖의 위상을 생각해 본다. 문文의 의미를 생각해 본다. 문묘文廟는 공자를 모신 사당을 말하며 성묘聖廟 근궁芹宮이라고도 한다. 미나리 궁(집)이라는 것은 무슨 뜻일까. 좌우간 고려 말에는 악공을 명明나라에 유학 보내고 악기를 들여와 명나라의 아악을 종묘 문묘 조회朝會 등에 쓰게 하였고 공양왕 때는 아악서雅樂署를 설치하여 종묘의 악가樂歌를 가르치고 이를 관장하게 하였다. 조선시대에도 고려의 아악을 그대로 계승하였지만 세종 때에 와서 크게 정리되었다. 대개혁을 하여 새 출발을 한 것이다. 한국 아악은 중국에서 유래한 의례음악으로 생각하고 있지만 세종에 의하여 창제된 것이었다. 근자에(2010) 출간된 『아악 혁명과 문화 영웅 세종』(한홍섭)에서 한국 아악이 세종에 의하여 신악新樂으로 창제되었음을 주장하고 있다. 이는 훈민정음 창제와 함께 문화적 자주국이라는 꿈을 이루고자 했던 세종식 문화대혁명이라고 말하고 있다. 세종은 기존의 중국 아악 대신 한국의 새로운 아악으로 국가의례를 거행하고자 했으며 그로 인해 완성된 신악이 우리 조선 아악이었던 것이다. 중국의 아악이 아니고 우리의 아악을 사용하여 국가의례를 거행한 것이다. 세종은 박연으로 하여금 궁중 아악을 정비하게 하면서 악장樂章 악보樂譜 악기樂器를 일일이 흠정欽定하였고 모든 음악의 기틀이 되는 대대적 사업을 벌였던 것이다. 흠정은 왕이 친히 제도나 법률 등을 제정하는 일을 말한다. 악리樂理학자 박연은 12율관律管과 편경을 독창적인 방법으로 제조하였고 아악을 고려나 송나라의 대성악을 뛰어넘어 주나라 것에 가까운 아악으로 재정립 복원하여 음악의 새 기틀을 확립하였다. 새로운 토대 위에 음악 이론 환경 제도를 개혁하고 새 뿌리를 내리게 하고 꽃을 피운 것이다. 제악制樂의 임무를 전관專管하게 된 박연은 악기를 제작하고 조회 제사 등의 아악보雅樂譜를 발간함으로써 아악이 공식 의례음악으로 자리를 굳히게 하였던 것이다. 조선 건국 초 혼란이 안정되어 문물의 정비에 힘을 기울이는 가운데 아악을 독자적으로 복원하여 그 용도가 사회 전반으로 확대되었던 것이고 아악의 융성은 극에 달하였던 것이다. 그 중심에 박연이 있었던 것이다. 줄기찬 상언과 악기의 제조 불굴의 의지는 개혁의 견인차가 되었다. 신악이 완성된 후 그 첫 의례는 새 역사의 시작이었다. 하나의 혁명적 사건이었다. 중국의 아악이 아닌 우리의 독자적인 아악을 사용하려는 자주적 태도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중국의 한문이 있음에도 우리의 말 글인 훈민정음을 창제하였고 중국의 음악을 기보記譜하는 악보가 널리 사용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고유의 음악을 기보할 수 있도록 따로 동아시아 최초의 유량악보有量樂譜인 정간보井間譜를 창제하였듯이 우리 문화의 자주적 혁명이었던 것이다. "그래 바로 이것이야!” 박연은 세종 임금의 쾌재를 누구보다 먼저 공감하며 속으로 춤을 추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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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 흙의 소리 59흙의 소리 이 동 희 복귀 <6> "또 조칙詔勅을 맞이하는 예는 근정문勤政門에 들어오면 황종궁을 연주하고 전하께서 군신을 거느리고 예를 행할 때에는 고선궁을 사용하소서. 성절聖節 하례에는 전하의 출입과 예배에도 고선궁을 사용하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다만 악보에서 연주하는 환종궁과 고선궁이 하나가 아니니 다시 한 궁을 골라서 조칙을 맞이하는 데 소속시키고 전하의 출입에 쓰는 황종궁은 사용하지 말도록 하고, 고선궁 한 궁을 골라서 정조와 동지와 성절, 전하의 망궐례 및 조칙 행례의 의식에 소속시키고 세자의 예배에 쓰는 고선궁에는 사용하지 말도록 함이 어떻겠습니까?” 박연이 임금께 하례에 대하여 계속 아뢰자 좌의정 황희 우의정 맹사성 예조판서 신상이 옳다고 하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러나 대제학 정초는 이에 동의하지 않았다. "황종궁이 천자에 소속되어 제후는 사용할 수 없다면 전하의 평상시에도 또한 사용할 수 없는데 지금 이미 이를 사용하고 있은즉 천자가 하늘에 제사하고 종묘에 제향하고 출입할 때에 모두 모두 황종을 연주하게 되니 비록 정조 동지 망궐례 칙명을 맞이할 때에도 이를 사용하는 것이 무엇이 해롭습니까?” 그 같은 이의 의문에 대하여 박연이 설명하려 하자 이조판서 허조가 손을 저으며 의견을 내었다. "신은 악을 배우지 못했으므로 감히 함부로 의논할 수 없습니다. 원컨대 집현전으로 하여금 역대의 용악用樂 제도를 자세히 상고한 후에 헌의獻議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렇게 하여 황희 등의 의논에 따랐다. 세종14년 1월에도 박연은 앞에서도 이야기한 대로 공신당功臣堂과 관련하여 상언하였다. "종묘의 뜰 안길 동쪽 한 편은 제사를 거행하는 장소가 되는데 공신당이 바로 그곳에 있어서 지면이 매우 좁으며 또 제사를 거행할 때에는 삼등 공신은 공신당에 앉아서 흠향하지 못하고 그 위패를 내다가 세 줄을 만들어서 악현惡懸의 동쪽 공신당 문의 서쪽에 설위設位하게 되며 또 칠사위七祀位를 그 서쪽에 설치하게 됩니다.” 칠사위는 제사를 지내는 일곱 신위로 사명신司命神 호신戶神 조방신竈房神 중류신中霤神 문신門神 여신厲神 행신行神을 말한다.(고려사 60권 5장) 박연은 제사를 설시하는 위치 방법 등에 대하여 그 부당한 이유를 사리를 따져서 하나 하나 아뢰었다. 제사를 받들 때에 여러 집사의 배례하는 위치가 서로 매우 가까이 닥쳐서 온당하지 못하다. 그리고 지금 악현을 뜰 가운데에 벌려 놓기를 조회 때와 같이 하기 때문에 헌가의 설치가 지난 날에 비교하여 더욱 좁게 되었다. 그런 까닭에 근일의 대제 때에 문무관의 물러서는 위치가 한 데 합쳐서 헌가의 동쪽에 있기 때문에, 땅이 좁아서 용납하기 어렵고 문무와 함께 헌가의 서쪽에 있으며, 칠사위도 또한 헌가의 서쪽에 옮겨 갔으니 제사가 다 편하지 아니하다. 이것이 공신당의 위치가 마땅치 않은 첫째 이유이다. 또 사리를 따져 말한다면 유공한 신하는 제사 때만 임시로 뜰 안에 들어가서 조종에 배합하면 족한 것이다. 어찌 내정內庭의 위 육실六室의 곁에 당우堂宇를 세워 상거常居하는 묘실廟室로 해야 할 이치가 있는가. 이 또한 마땅치 못한 둘째 이유이고, 반드시 정상庭上에 공신당을 두게 한 뒤에 배향할 필요가 없는 것이 세 번째 마땅치 않은 이유라고 말하였다. 그리고 이어서 박연은 어느 때보다 공손하게 엎드려 임금의 재가와 판단을 구하였다. "다행히 이제 묘정廟庭을 열어 넓히고 공신당도 묘 밖의 빈 땅에 옮겨 놓아서 묘궁廟宮을 엄숙하게 하여 제례를 거행하는 데에 편의하게 하시고 만약 부득이하면 묘의 담 한 면을 두어 자〔尺〕둟어 열어서 밖에 공신당을 설치하고 담에 문을 만들어 놓으면 묘 안의 공신당의 당우 됨에 무방할 것입니다. 엎드려 성재聖裁를 바랍니다.” 당우는 앞에서도 나왔지만 정당正堂과 옥우屋宇, 규모가 큰 집과 잡은 집을 아울러 이르는 말이다. 왕은 박연의 상언을 바로 예조로 내려 보내었다. "공신당은 묘정 밖에 땅을 살펴서 이설(移設)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예조에서는 또 박연의 의견을 받아들여, 從之 그대로 따랐다. 박연이 그의 이름 然을 堧으로 바꾼 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다. 堧은 묘廟의 안 담과 바깥 담 사이의 빈터라는 뜻인데 혹시 이 무렵 이름자를 바꾼 것인지 또는 그에 대한 지식 또는 조예로 인한 상언인지 모르겠다는 생각도 해 본다. 어떻든 상언 상주의 연속이었고 그것들은 그대로 받아들여지고 시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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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악신문] 이무성 화백의 작화 : [연재소설] 흙의 소리 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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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 흙의 소리 57흙의 소리 이 동 희 복귀 <4> 주남 소남은 시경詩經 「국풍國風」의 편명篇名이다. 산은 장백산長白山으로부터 왔고/ 물은 용흥강을 향해서 흐르도다/ 산과 물이 정기를 모으니/ 태조대왕이 이에 탄생하셨도다/ 근원이 깊으면 흐름이 멀리 가고/ 덕이 후하면 광채가 발생하도다/ 문득 동방을 차지하니/ 즐겁게도 국조를 전함이 한이 없도다 山從長白山來 水向龍興江流 山與水鍾秀儲祥 太祖大王乃生 源遠流長 德厚流光 奄有東方 樂只傳祚無疆 유사눌은 시, 가사歌詞를 지은 배경을 설명하였다. 정유년丁酉年(태종 17, 1417년)에 명령을 받아 함길도 도순문사都巡問使가 되어 갔다가 화주和州의 강물이 동쪽으로 흐르다가 구불구불 구비져서 남쪽으로 가고 또 동쪽에서 다시 구비져서 남쪽으로 흘러 동으로 바다에 들어가는 것을 보았는데, 첫째 구비는 화주 둘째 구비는 준원전濬源殿이었고, 진산부원군晉山府院君 하윤河崙이 그 강 이름을 용흥이라 지었으니 왕업의 터전을 아름답게 여긴 것이며 이에 우리 조선의 역년歷年의 장구함이 강물과 함께 흘러 쉬지 않고 서로 시종始終을 같이함을 볼 것이고 그런 까닭으로 이때를 당하여 용흥가龍興歌 한 편을 지어 태조대왕께서 천의天意에 순응하여 나라를 처음으로 세운 공덕을 노래하여 훗날의 사람에게 보이라고 했으나 불행히도 병이 들어 초고草藁를 만들어 놓고 다시 헐어버린 것이 두세 번 되니 벌써 13년이 되었다고. 그리고 아뢰었다. "비속하고 졸열함을 헤아리지 않고 삼가 뒤에 썼사오니 엎드려 바라옵건대 전하께서는 한가한 여가에 보아 주시고 이를 관현에 올려서 악부에 간수하여 조정에서 연주하고 향당에서 사용하여 온 나라 신민들로 하여금 영구한 세대에 잊지 않도록 하옵시면 다행이겠습니다.” 왕은 가사를 관습도감慣習都監에 내렸다. 관습도감은 음악의 실기연습을 맡아보던 관청으로 주로 궁중 잔치에 쓰이던 향악과 당악 연주를 위한 실기연습을 관장했다. 박연은 뒤에 관습 도감사都監使를 맡아보기도 했다. 유사눌은 예문관 대제학大提學으로 있을 때 음률과 악에 대하여 조예가 있는 사람을 찾고 있는 왕에게 지음인知音人이라며 박연을 천거하였다. 지음은 음악의 곡조를 잘 알고 새나 짐승의 울음소리를 가려 잘 알아들음을 말한다. 거문고의 명인 백아伯牙가 그의 거문고 소리를 즐겨 듣던 벗 종자기鍾子期가 죽자 자신의 소리를 아는 사람이 없다고 슬퍼한 나머지 거문고의 줄을 끊었다는 열자列子 「탕문편湯問篇」에서 유래하는 말이기도 하다. 그것은 박연의 운명이 되었다. 관습도감사 박연은 전과 같이 계속 상언上言을 하였다. "회례에 여악을 사용하지 않는 것은 좋은 법이나 정재呈才의 무동舞童의 정수는 모두 50인인데 빠진 수를 갖추어 모두 60여인이나 되니 이것은 오래도록 폐지할 수 없는 법이므로 염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각도의 감사가 주현州縣의 노비의 쇠잔함과 번성한 것을 참작하여 한 고을에 1명씩 혹은 두 서너 고을을 합하여 1명씩 혹은 너 댓 고을을 합하여 1명씩으로 진공進貢하는 정원을 나누어 정하여 동남은 11세 이상 13세 이하의 용모가 단정하고 깨끗하며 성품과 기질이 뛰어나게 총명하여 어전의 정재에 갖출만한 사람을 가려서 경상도에 15명 전라도에 10명 충청도 강원도에 각 7명 경기도 황해도 평안도에 각 5명 함길도에 3명을 원정원으로 정하고 서울과 지방에 명부를 두고 임자년壬子年(다음 해)부터 윤번으로 수효를 채워서 서울로 올려 보내게 하고, 관청에서 의복과 양식을 주고 또 초료草料를 주게 하고 한번 입속入屬한 이후로 나이가 장성하여 쓰지 못하거나 사고가 있어 일할 수 없는 사람은 나누어 각 고을에 배정하고는 전의 것에 의거하여 수효를 채워서 보내게 해야 할 것입니다.” 늘 그랬듯이 구체적으로 한 치도 빈틈없이 제안을 하였다. 정재는 대궐 안 잔치 때에 벌이는 춤과 노래이다. 동남童男이 장정이 되기 전에 어버이를 떠나오고 친족을 버리게 되어 생활할 길이 없고 의식衣食을 계속하기가 곤란하면 반드시 배우기를 즐겨하지 않을 것이며 또 어린아이의 용모는 오래 지속되지 못하는 데도 정재하는 연월은 기한이 있으니 소재관所在官으로 하여금 한 집만 사역하지 말고 부모형제나 멀고 가까운 족속 등 동남이 의지하는 집은 그냥 놀리고 역사役事를 시키지 말고 그들로 하여금 봉족俸足을 들게 하고 또 사시로 의복과 양식을 내려서 우대하여 학문을 권장하게 하고 나이 장성하여 쓸 수 없는 지경에 이른 후에 본 고장에 돌려보내어 역을 정하게 할 것이며 만약에 여러 가지 음악에 겸하여 익혀서 당상과 당하의 악공이 될만한 사람이 있으면 그대로 주악의 수료에 충당하도록 해야 할 것이라고 세부적인 부분 제안을 계속하였다. 박연의 상언 상주는 끝이 없고 거침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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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 흙의 소리 55흙의 소리 이 동 희 복귀 <2> 연일 수없이 올리는 상주 가운데 조회 때 쓰는 음악에 대한 것이 많았다. "매달 초하루와 16일 두 차례는 옛 제도에 따라 순전히 아악雅樂만 쓰고 그 나머지 네 차례는 전례대로 속악俗樂을 쓰자고 하였는데 당나라 제도에 의하면 아악은 오직 교묘郊廟 원회元會 동지冬至 그리고 책명대례冊命大禮 때만 썼습니다. 진씨악서陳氏樂書 궁가도宮架圖에 의하면 삭일수조朔日受朝 동지조하朝賀 원일元日조하 때 썼습니다. 옛 제도에 의하여 초하룻날과 명나라의 책명대례 축하와 조고詔誥 칙서勅書의 영명迎命에는 헌가軒架를 쓰고 그 나머지 아일衙日에는 전대로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세종 12년 9월에 올린 글이다. 책명은 왕세자 왕세손 비빈 들을 책봉하는 임금의 명령이며 대례는 임금이 친히 주관하는 궁중 대사이다. 조고는 윗사람 아랫사람에게 알리는 일이며 영명은 명령을 따르는 것을 말한다. 한자를 같이 쓰는 것은 이해를 돕기 위해서이고 설명도 그런 것이다. 물론 필자를 기준으로 한 것이다. 삭일 수조는 초하루 임금이 신하들로부터 조회를 받던 일이고, 동지 조하는 동지에 신하들이 조정에 나아가 임금에게 하례하던 의식이며, 원일은 정월 초하루, 아일은 임금과 신하가 모여 조회를 하고 정사를 보던 날을 말하는데 이렇게 다 설명을 할 수는 없지만, 조회의 형태 일정이 다양하였다. 박연은 조회악에 대하여 여러 가지 필요한 요건들을 일일이 말하였다. 헌현軒縣 18가架를 당하堂下에 설치하고 거문고와 비파 금슬琴瑟은 당상에 설치하되 모두 6개씩을 쓰게 하며 또 악공들의 업을 연습하는 것도 미리 익혀야 하므로 연습해서 될만한 악공 30명을 선택하여 가르치되 그 총 수는 139명으로 하고 각 관아의 나이 젊은 노자奴子를 택하여 그 수효를 충당하고 악공은 공사비公私婢의 자식으로서 갑오년 6월 이후에 양부良夫에게 시집 가서 낳은 자와 간척干尺이나 보충군들에게서 낳은 자들로 충당하고… 아주 구체적이며 실질적인 제안이었다. 음악의 조리條理는 순전히 시작과 종결에 있으니 그 시종始終을 갖추지 못하면 궁성宮聲이 혹 가고도 돌아오지 않는 수가 있어 옛 사람들이 이를 상서롭지 못한 징조라고 일러 왔다. 조회 때의 음악은 당상 당하에서 일시에 연주해야 하고 진씨예서陳氏禮書의 조하 의절에 따라 헌가만 쓰도록 하고, 선궁법旋宮法을 써서 정월에는 태주 2월에는 협종 3월에는 고선 4월에는 중려를 연주하며 12월의 대려에 이르러서 끝나도록 하고 이와 같은 순서로 연습해 연주하도록 해야 하며, 조회악의 가자架子(편종 편경을 달아 놓은 틀)는 먼 곳에 두지 말고 반드시 낭하에 옮겨 간직하게 하며 그 체제體制도 전례에 구애 없이 경쾌하고 화미華美하게 개조하고 쇠를 사용해 견고하게 결속하여 다시 떨어지거나 쪼개지지 않게 하고는 평상시에는 전부를 옮겨 들여놓고 위를 덮어 티끌의 오염을 피하게 하고 사용할 때에는 다시 옮겨 내놓고 배설하게 해야 한다고 청원하였다. 조회악에 대한 세세한 부분에 이르기까지 구체적으로 제시하였다. 조회 때 헌가는 반드시 견고하고 내구성耐久性 있는 가래나무(楸木) 등의 목재라야 할 것이며 그 장식 부분은 유자나무(椵木) 따위도 좋을 것이니 때에 늦지 않도록 미리 준비하여 쓰도록 할 것이며, 현가의 악기는 종鍾 경磬을 제외하고는 거문고와 비파가 각기 6개 축祝 어敔가 각 1개 훈塤 부缶 지篪 적笛 소簫 생笙 우芋 관管 약蘥이 각각 10부部이며 북(鼓)의 제도에 있어서는 옛 그림을 상고하니 조회와 사의射儀에 모두 건고建鼓를 사용하였는데 그 장식과 위의威儀가 제악祭樂과 유사하지 않고 이러한 악기들은 모두 미리 제작하지 않을 수 없으니 악기감조색樂器監造色을 설치하여 시기에 미칠 수 있도록 제조하게 하자고 한 위에 열거한 조건은 모두 상신한 대로 하라고 청원하였다. 박연의 상주는 그대로 따랐다. 세종실록 49권 기사이다. 쉰을 넘은 나이지만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았다. 정열이 넘치고 혈기가 왕성하였다. 조회의 음악은 왕의 행차의 기품을 고양하는 아악으로 이에 대한 왕의 관심도 자별하였다. 세종 12년 12월, 임금이 상참常參을 받고 윤대輪對를 행하고 경연經筵에 나가서 음악에 대하여 이야기하다가 박연에 대하여 말하였다. "박연이 조회의 음악을 바로잡으려 하는데, 바르게 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율려신서律呂新書도 형식만 갖추어놓은 것 뿐이다. 우리나라의 음악이 비록 다 잘 되었다고 할 수는 없으나 반드시 중국에 부끄러워할 것은 없다. 중국의 음악인들 어찌 바르게 되었다 할 수 있는가.” 必無愧於中原之樂 亦豈得其正乎, 우리나라 음악과 중국의 음악에 대한 평가였다. 그와 동시에 박연에 대한 평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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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무성 화백의 작화 : [연재소설] 흙의 소리 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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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 흙의 소리 53이 동 희 유랑 <6> "아무 것도 아니여. 사랑, 참 좋지. 그것보다 귀하고 아름다운 것이 있겠나. 사랑을 위해서 목숨을 다 바칠 수도 있는 것이고 그것은 대단히 값지고 보람된 일인지 모르지. 그러나 뭐라고 할까, 이것은 글쎄, 한 구뎅이 다 죽는 거여. 이게 뭐 하자는 건가. 아니 도대체…” 그는 다시 말을 잇지 못하였다. "선생님, 걱정해 주셔서 참으로 고마운 말씀인데요… 그렇지 않아요. 그리고 더 잘 할게요. 염려하시지 않도록 할게요.” 그리고 가던 길을 어서 가자고 한다. 그러나 박연은 굳은 표정으로 다래를 노려보며 계속해서 말하는 것이었다. "내가 그렇게 할 일 없는 사람인 줄 아는가? 왜 마음에 없는 소릴 하고 있는 기여?” "조금 더 기다려 보세요. 선생님. 아셨지요, 네?” 다래는 다시 같은 말을 하였다. 눈은 저쪽 먼산을 바라보고 있었다. 박연은 굳은 표정을 조금도 누구러뜨리지 않고 목소리를 좀 더 높였다. "내 말 안 들으려거든 돌아가. 내가 공연한 생각을 한 모양일세. 가서 잘 해 보아.” 벌떡 일어나며 말하였다. 그리고 가던 길 갈 차비를 하는 것이었다. 잔뜩 노기를 띄였다. 그러자 다래는 자세를 바꾸고 스승을 도로 앉게 하는 것이었다. "잘 못 했어요. 선생님. 다시 말씀드릴게요.” 갑자기 눈물을 주루룩 쏟으며 말하는 것이었다. "죄송합니다. 용서해주세요. 선생님.” "으음.” 박연은 못 이긴 척하고 그 자리에 도로 앉는다. 그녀의 반응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아직 안도의 숨은 쉬며 생각을 바꾸지는 않았다. "선생님 말씀이 다 맞아요.” 다래는 눈물을 닦으며 고개를 푹 숙이고 울먹이며 말하였다. "선생님이 말씀하신 그대로입니다. 정말 이러다가는 다 죽겠어요. 왕자들도 서로 저를 못 차지하여 혈안이 되어 있고…” 앞에서 사정을 얘기하였었다. 노래냐 소리냐 그런 것은 뒷전이고 매일 밤 곡예를 하고 있었다. 죽음의 행진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방법이 있다면 누가 죽는 수 밖에 없었다. "정말 어떡해야 될지 모르겠어요. 그러나 잘 해결해 보겠어요. 너무 염려하지 마세요. 선생님.” 사실대로 말은 했지만 아무런 대책은 없었다. 박연은 입을 쑥 내밀고 있었다가 일어나며 말하였다. "어떻게 더 내려갈 티여? 돌아갈 티여?” 선택을 하라는 것이었다. 대단히 단호하였다. "빨리 돌아가야 되는데…” 가서 어떻게든 그녀가 해결을 해야 되는데 아직 아무런 대책이 없는 것이었고 그렇다고 그냥 있어서도 안 될 일이었다. "잘 생각해서 결정해야지.” 박연은 가던 길을 먼저 나서며 걷는 것이었다. 다래는 멍히니 그 자리에 서 있다가 스승을 따라 서는 것이었다. 그리고 말없이 무한정 걸었다. 주막도 지나치고 장터거리도 지나고 걷기만 했다. 그날 저물어 캄캄해서야 두 사람은 한 정자에 쉬며 얘기를 하였다. "선생님 아무래도 제가 올라가야 될 것 같애요. 무작정 몸만 빠져나온다고 해결될 일도 아니고… 가서 잘 해 볼게요.” 다래는 계속 걸으며 생각한 것을 결론적으로 말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에 대한 스승의 대답은 얻지 못하였다. 박연이 얘기하였다시피 그 문제를 누가 이래라 저래라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소리가 어떻다 노래가 어떻다 하는 것도 어려운 일이지만 이것은 그럴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래 이거고 저거고 내가 더 얘기할 수 있을지 모르겠네. 잘 처신해야. 무엇을 위하여 사느냐, 그것이 사람을 평가하는 거여.” 이것은 사랑이고 저것은 예술인지 모른다. 그 반대인지도 모른다. 그까지였다. 스승이 할 수 있는 이야기는 다 하였다. 아무런 방도가 없었다. 박연이 불러 낸 것도 몸을 잠시 빼기밖에 못 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뒷날, 아름다운 자태로 예인의 정점을 찍고 평원대군 금성대군 화의군 왕자들 뿐 아니라 장안의 뭇 한량들과 치정극을 벌이며 죽음으로 끝장을 낸, 그녀의 행각에 대한 스승의 사랑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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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악신문] 이무성 화백의 작화 : [연재소설] 흙의 소리 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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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 흙의 소리 52흙의 소리 이 동 희 유랑 <5> "자네가 대답을 해봐.” 박연은 느닷없이 다래에게 화살을 돌리었다. 화살이라고까지 할 것은 없는지 모르지만 그가 무작정 따라오라고 해 놓고 그녀에게 그런 연유를 묻고 있는 것이었다. "제가요?” 어리둥절한 다래는 모르겠다고 하며 술을 한 주전자 더 가져오게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몇잔을 더 나누고는 혀가 꼬부라져가지고 말한다. "뭐 선생님이 저를 아끼시고 보고 싶어서 그런 것 아니겠어요?” "허허허허… 그건 그리여. 허허허허… ” "그리고 부족한 저를 가르쳐 주실라고 하는 거지요.” "허허허허… 잘 아네.” "자주 찾아 뵈어야 하는데 죄송해요.” "너무 잘 아네. 허허허허…” 다래는 그제서야 호호거리며 다시 스승의 무릎에 올라 앉는다. 그리고 그는 다래를 꼭 껴안는다. 한참 그러다 그녀를 내려 앉히고 술잔을 들고 비운다. 그리고 술을 따라 다래에게 준다. "네. 선생님.” 다래는 두 손으로 잔을 받아 바로 마시고 반배를 한다. "호호호호… 고마워요. 선생님.” 참으로 귀엽고 사랑스럽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존재이다. 그러나 그가 묻는 말에는 답을 하지는 못한다. 그는 다시 뜸을 들인다. 그리고 잠을 자고 나서 길을 가며 이야기를 하였다. 새벽 닭이 울고 희붐히 날이 새기를 기다려 길을 나섰다. 큰댓자로 누어 코를 있는 대로 골다가 그가 깨우는 대로 눈을 비비고 일어나 따라나선 것이다. 박연은 허위허위 앞장을 서서 쉬지도 않고 걸었다. 햇살이 달 때까지 얘기도 하지 않고 걷기만 했다. 마치 쫓기어 도망이라도 가는 사람들처럼. 땀을 뻘뻘 흘리었다. 얼마를 정신없이 걷다가 그녀가 도저히 못 참겠다는 듯이 소리를 지른다. "해장이나 좀 하고 가야지요오.” "따라오곤 있는 거지?” "아이 참 선생님도. 호호호호…” "허허허허… ” 박연은 돌아도 보지 않고 웃기만 한다. "가다가 샘물이나 한 바가지 들이키고 가는 게 나을 거여. 허허허허…” "물이 됐든 술이 됐든 좀 숨을 들이고 가요오, 네에.” 그러는 사이 마을 장터 앞을 지나게 되었고 다래는 거기 주저 앉고 만다. 너나 없이 출출하던 터였다. 술국에 해장도 하고 밥도 한 덩이씩 말아 요기를 하였다. 그리고 금방 다시 일어나 걸었다. 얼마를 걷다가 징검다리를 건너며 세수를 하고 발을 담갔다. 숲 속의 새 소리가 반기고 물고기가 뛰었다. "연비어약鳶飛魚躍일세.” "좋다는 얘기지요.” "그렇지.” 자연 풍광도 아름답고 삽상颯爽하지만 배가 적당히 부르고 얼근히 술기운이 돌았다. 중천으로 향하고 있는 해가 흰 구름 사이를 들랑 날랑 하였다. 소슬한 바람이 살갗을 스치고…. 매일 일에 쌓여 헤어나지 못하고 먹을 갈아 쓰고 상주를 하기에 여념이 없던 생활을 벗어나 한 마리 새처럼 날고 있는 것이었다. "제가 또 한 마디 해 볼까요?” "그럴 티여?” 다래는 새타령을 부르기 시작하였다. 물에 들어서서이다. 몸을 흔들어 춤을 추며 만면 웃음을 띄고였다. 그녀는 소리를 계속 뽑을 기세였다. 그는 전날처럼 손바닥으로 그의 옆 자리를 두드렸다. 넓적한 돌바닥이었다. 그녀가 와서 앉기를 기다려 어제 하려던 얘기를 꺼낸다. "자네를 그냥 둬서는 안 될 것 같아서 이렇게 불러낸 거여.” 너무나 무겁고 근엄한 표정이다. 그의 생각이 얼굴에 다 씌어 있었다. "네에…” 그녀는 얼른 말귀를 알아차린 것이다. 졸지에 분위기는 완전히 바뀌었다. 발만이 아니고 온 몸이 물 속에 잠긴 것 같다. "괜찮은 기여?” "안 괜찮아요.” 박연은 고개를 한참 끄덕끄덕하다가 다시 말한다. "자네 인생은 자네가 사는 게지 다른 사람이 뭐라고 할 수 없는 게여. 내가 뭐라고 자네에게 이래라 저래라 할 수도 없는 것이고 그래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나…” "선생님…” 박연은 다래의 얘기를 손을 저어 제지하며 말을 계속하였다. "내가 자네 소리에 대하여는 이렇다 저렇다 말하여 왔지만 자네의 사생활에 대하여 사랑에 대하여 어떻게 뭐라고 말할 수 있겠나. 그럴 수도 없고 그래서도 안 되는 거지. 내가 그것을 왜 모르겠나. 금쪽같은 자네에게 그래서는 안 되지. 그러나 그러나 말이여. 그것은 사랑이 아니여. 사랑이 아니고…” 그는 말을 잇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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